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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국문학에서의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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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문학에서의 보편성

보편적 본성의 재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즐겁게 할 수 없다. 세익스피어는 모든 문필가를 뛰어넘은, 최소한 모든 근대 문필가를 뛰어넘은 본성의 시인이다......그의 등장인물들은 다른 곳에 없는 특정 지역의 관습에 의해 수정되는 것이 아니다......다른 시인들 글의 등장인물은 종종 특정 개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글에서, 등장인물은 통상적으로 보편적 인간의 전형이다.

-사뮤엘 존슨

이러한 보편성, 이러한 필연성은 논리적인 것 이외의 심리학적 사실이며, 이는 마음의 순수한 자동활동의 결과로서 비롯된다. 그것은 적절한 근거로부터 비롯된 논리적 결론이 아니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언어에 관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한다 - 하나의 보편적 진술은 사실은 사고의 신경장치에 관한 특정한 진술이다.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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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원리에 대한 정열적인 믿음에 있어서 사뮤엘 존슨도 오스카 와일드도 해묵은 문제 즉 ‘무엇이 개별적인 것이고 무엇이 보편적인 것인가?’에 대해 균형있는 진술을 하지 못한다. 존슨은 아마도 세익스피어가 개별적이며 종류적인 성격을 창조하였다고 말하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와일드는 공통적 믿음의 표현은 개별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것 양자이다라고 말하는게 더 나았을 것이다. 어떤 일정한 순간에 어떤 일정한 화자에 의해 어떤 일정한 언어로 말해질 때, 개별적인 것은 참으로 어떤 종에 속하는 개별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은 또한 개별적인 것이기 위해 참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개별적인 것에의 강조는 현재는 한때 사물에 대한 보다 코스모폴린턴적 견해라고 불리웠던 것을 관련하는 일부 서클에서 옹호된다.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태초부터는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철학적 사색으로는 지금까지 질문하여 왔다. 전문적 의미와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물론 보편적인 것은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 우리는 모두 언어로 말을 한다. 우리는 어떤 필요성, 정서, 이상을 공유한다. 이러한 현상들이 개벌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이 보다 덜 보편적인 것이 되게끔 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가장 개별적인 음성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말하는 음성인데, 이는 가장 보편적인 음성이며, 기독교도의 음성이며, 진리의 음성이다. 즉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던 그것은 파르마트만의 음성이다. 간략히 얘기해서, 보편적인 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것이며, 개별적인 것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이다.

신, 존재와 같이 보편적인 것은 쉽게 논리적 증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와일드가 철학을 심리학으로 절하할 때, 그는 이를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 두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서구의 철학은 오랫동안 보편적인 것을 정의하고자 하여 왔으며, 그러한 노력들에 관한 어떤 피상적인 검토는 흥미있는 것일 수도 있다. 소위 “경험주의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에서 내재적인 보편성을 추구함에 의해 일반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후대의 고전문학 뿐만 아니라 신고전주의 문학에 일반적인 경향으로 자리잡아 왔다. 예를 들면, 문학비평의 영역에서 호레이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장르 이론을 고정적 유형의 원리(a doctrine of fixed types)로 환원하였다. 고전적인 견해는 윤리학적 규범, 미의 비례, 예절의 원리를 선호하였다. 이들 원리들은 미학적 이론과 실천을 규범화하곤 하였다.

기독교는 전통에의 호소로 서양사상에서 이러한 보수적인 경향을 강화하였다. “5세기의 성자인 레어링의 빈센트(Vincent of Lering)은 “늘상, 어디서든 그리고 모두에게 교육되어 왔던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명목적인 것(nominal)과 실재적인 것(real)이란 용어로 불려진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에 관한 중세의 논쟁은 고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엎치락 뒷치락 했었다. 하지만 보다 영속적인 실재론자들의 견해가 좀더 압도했던 것 같다. 아키나스에게 있어서, 마음의 본질적 특징은 보편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에 있으며, 보편적인 것은 감각에 의해 제공된 지식을 초월하는 범주에 있다.

이러한 논쟁은 르네상스 시대로 확장이 되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텔레시우스(Telesius, 1509-1588)는 지식은 감각에 기반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주장했던 반면에, 캄파넬라(Campanella, 1568-1639)는 감각은 우리를 보편적인 것과 결합하게 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한다. 폼포나시우스(Pomponatius, 1462-1524)가 모든 종교를 우주론적 법칙의 작용으로 보았던 것과 같이, 후커(Hooker), 타인데일(Tyndale) 그리고 그로티우스(Grotius)와 같은 후기 르네상스의 사상가들은 자연의 법칙, 즉 이후 헤겔을 예시하는 일종의 구체적 보편성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자연(nature)에 관한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계몽주의는 인간본성(human nature) 개념을 창조한다. 이는 이어서 존슨이 말한 바의 일반적 본성(general nature)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흄은 “모든 국민과 모든 세대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거대한 보편성이 있으며, 인간의 본성은 원리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여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은 보편적으로 인정된다”라고 하였다.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원리는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영향 하에 계몽주의는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 속에 포괄함에 의해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환원시킨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계몽주의는 때때로 보편적인 것을 초월적인 것(transcendental)으로 간주한다. 사뮤엘 존슨은 그의 동방적 이야기인 라셀라스(Rasselas, 1759)에서 문필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필가는 자신을 시대와 국가의 편견을 포기하여야만 한다. 문필가는 자신의 추상화되고 가변적인 진술에서 옳고 그름을 파악하여야만 한다. 문필가는 현재의 법률과 의견들을 무시하고, 항상 동일하게 존재하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진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영국의 신고전주의자는 문화적으로는 상대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는 절대적인 보편적 진리의 원리를 피력하였다.

우리는 계몽주의를 특징짓는 명료성(clarity)의 선호에서 낭만주의적 사상을 특징짓는 신비(mystery)의 선호로 향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신고전주의자들의 보편적 진술에 관한 관점은 상징에 관한 관점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한 예로 다음과 같은 괴테의 사상, 이미지 그리고 언어와 상징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들 수 있다.

 

상징은 시각적인 것을 하나의 관념으로 변모시키며, 관념을 어떤 이미지로 변모시키게 된다. 이미지 내에서 관념은 무한히 강력하고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머물며, 모든 언어로 말해진다 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시에는 통일적이고 따라서 보편적인 그 무엇이 존재하는데, 이는 문화의 경계를 가로 지르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괴테와 같은 시기의 독일 관념주의 학파의 사람들에 영향을 받았고, 보다 더 철학적인 콜러리지(Coleridge)에게 있어서, 시의 목표는 “여러 개 속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 통일성 혹은 유일성의 현현”을 표출하는 것이다. 괴테와 콜러리지를 함께 연구함에 의해, 우리는 이 비타협적인 개별성이 화려한 보편성이 되는 과정을 - 그것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하더라도 - 동일시하게 된다. 칸트의 경험(Erfahrung)에서의 주관과 객관의 융합과 평행을 이루는 운동 속에서, 괴테는 그의 마음 속에서 “적절하고, 유사하며 또한 이질적 관념” - 본유적일 뿐만 아니라 이국적 관념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을 환기하는 것으로의 상징적 대상에 관해 말하고 있다. 괴테는 계속해서“결과적으로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 이들 상징적 대상들은 어떤 유일성과 보편성을 주장한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상징은 칸트의 주관과 객관의 통합을 위한 양상으로서의 경험과 경쟁한다. 이러한 모순을 재구성하고 주관과 객관을 칸트처럼 진리 뿐만 아니라, 개별성과 보편성 양자와의 결합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헤겔을 기다려야 했다. 헤겔은“자연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 진실로 참된 모든 것은 본유적으로 구체적인 것이며, 본질적으로 주관성과 객관성 양자와 또한 보편성을 갖고 있다”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구체적 보편성(the concrete universal)은 경험 상징의 개념을 궁극적 통합의 술어로 교체하고, 그의 온전한 철학적 깊이와 힘을 획득하게 된다. 헤겔 이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헤겔의 일반화에 지배되고 있으며, 그것은 완전히 구체적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보편적인 것에 대한 헤겔의 가치부여에 대한 반론 역시 철학적으로는 헤겔 그 자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문학의 보편적 원리 혹은 문학의 개별적 지류에서의 보편적 요소들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시란 - 소위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 그 자체가 보편적인 것이며, 이는 시는 경험으로부터 일반화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이는 후일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강화되게 된다. 본고의 목적상, 우리는 시가 보편적일 수 있는 방식에 관해 보다 특정적 의미를 탐구할 것이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인 영국문학에서의 보편적 요소는 두가지 측면에서 존재한다. 하나는 영국문학 자체이며 또다른 하나는 영국문학의 세계와의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가지로 질문을 구분할 수 있다. 영국문학에 관한 어떤 것이 본유적으로 보편적인 것인가? 그리고 영국문학에 관한 그 무엇이 실제적으로 그러한가?

실제적으로 말한다면, 영어가 보편적 언어가 된 이후에, 영국문학은 영어를 마스터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학습과제가 되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국문학이 보편적이어 왔다고, 말하자면, 전 세계적인 탐구의 주제가 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에 있어서조차도, 영국문학은 주목할만한 국제적 인기를 누려왔다. 다시 말하면, 영국문학은 의도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의 보편적 호소력에서 보편적이다. 그 이유 중 일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수세기 동안의 영국의 헤게모니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부분은 그렇지 않다. 키츠와 엘리엇, 디킨스 그리고 로렌스는 결코 대영제국의 문화적 지배 하에 있지 않았던 여러 나라에서 읽혀지고 있다. 우리는 영국의 고전에 대한 보편성을 주장하기 위해 세익스피어라는 탁월한 증거에 의존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영국의 고전이 단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읽히고 있다고 추정할 필요도 없다.

영국문학은 또한본유적으로 보편성을 띠게 하는 특징들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용어에 대한 두가지 의미 사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영국문학은 본유적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영국문학은 불가사의하게도 통합적이며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영국문학은 그리스와 로마, 근대의 유럽대륙,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그 외의 문학을 스스로 모델로 삼거나 통합하고자 하고 있다. 서구문학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영국문학은 또한 우주의 기원과 구조, 창조의 신화, 신의 신화, 인류의 시조에 대한 신화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본유적으로 보편적이다.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서남아시아적 기원을 갖고 있는 성경은 전통적 우주론과 신통계보학(theogony)의 주요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들 원천들은 또한 서구문학에서 이국적 소재들(아담과 이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트로이, 로마사의 내용)의 되풀이되는 리바이벌을 위한 재료가 된다. 우리는 고대 헤브류와 기독교, 그리스와 로마 문화가 초기 영국의 문필가들에게는 매우 이국적인 것이었음을 종종 망각한다. 또한 이러한 원천들의 도입은 초기 변방에 불과했던 섬나라 영국에 시·공간적으로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던 역사적 회고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성서적이고 고전적 전통에의 회귀는 대영제국이 점차적으로 그의 세력권과 영향력을 획득함에 따라 보다 덜 확고한 기법이 되었다.

광범위하게 다양한 전통과 양식들의 문집인 성경은 그 자체가 절충주의의 기준으로서의 근거로 작용하였다. 더욱이, 성경에서의 형과 대형, 예언과 실현, 지혜와 주석에 관한 수사학은 고대와 근대의 변증법의 모델을 제공하였다. 많은 성서적 이야기가 미래, 그리고 과거와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을 더 한층 보편화하였으며 그리고 (트로일로스와 크리세이데에서의) 초서, (세계사를 위한 플랜에서의) 랄레프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어서의) 블레이크와 같은 영국의 문필가들에게 이와 같은 포괄적 패턴을 채택하게끔 고취시켰다. 많은 책들을 한 개의 책으로 묶은 성경은 또한 문학적 영향력을 집중화하고, 그에 의해 전통을 표준화하거나 혹은 보편화하는데 기여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영향을 주었다. 규범(canon)의 형성에 관한 초기의 과정은 고전을 일종의 근거로 집결되게 하고 더나아가 이후의 규범형성을 위한 모델로 작용하도록 하였다. 다시금 양극적 시스템이 등장하고, 모든 유럽 문화에 구식과 신식의 공통적 전통을 제공한다. 성경은 그의 모방자들과 이론가들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모방의 고전적 원리는 이미 전통 그 자체 내에  부호화하였고 성서적인 것 보다 더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고전기 후기,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신고전주의의 관례로 작용하였으며, 그러한 관례를 위한 공통적 원리와 후기 이론을 위한 모델을 제공하였다.

성서의 신봉자들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보편적이며, 예수그리스도는 보편적 진리이며 구원자이다. 물론 똑같은 의미가 알라신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그러한 주장들은 보편성의 원칙을 기독교와 회교 문학에 부여하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이들의 보편성은 믿음에 의거하는가 아니면 단순히 일신론이 어떤 문화에 부여하는 통합구조에 의거해서인가? 그 답변이 무엇이든, 이 문제 자체는 지금도 영국문학의 또다른 보편적 국면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서, 스펜서 그리고 밀튼, 워즈워드, 테니슨 그리고 오덴은 그들 작품을 지배하는 믿음의 체계와 분리하여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기의 영국 문필가들은 보편적으로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이후의 문필가들은 얼떨결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거나 혹은 절대적으로 스스로를 이전에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들을 본받거나 하였다.

필자는 서양 고전이 후세의 문학에서 보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전적인 것에 관한 관념은 어떤 보편적인 것의 상태를 상정하였다. 기독교의 일신론적 믿음이 약화되기 시작함에 따라, 이 새로운 보편성에 대한 믿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전의 믿음을 대체하게 하거나 혹은 최소한 보충하게끔 하였다. 그래서 신고전주의 시대에 와서 서양문화는 또 다른 중심원리의 개념으로 정의된다.

필자는 성경을 최초의 문집으로 얘기하였고, 고전을 이질적인 개별성들에 대한 최초의 규범으로 얘기하여 왔다. 중세는 성서적 범례와 고전적 범례 양자에 의해 깊게 결정되었다. 하지만 예를 들면 아더왕에 관한 소재들의 편찬에서 보듯이, 어떤 새로운 관례와 그에 수반된 원리, 당대의 원천들의병치(collocation)가 나타나게 되었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병치는 정교한 혼합주의(syncretism)로 자리를 내어준다. 그에 의해 고전적 전통과 성서적 전통은 근대와 병합되었다. 이어지는 시대에 와서, 혼합주의는 다시 계몽주의적 절충주의(eclecticism)로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그에 의해 의미있는 전통은 유럽 바깥에 있는 혹은 이전의 문화적 정의의 울타리를 넘어선 다른 소재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영역이 넓어지게 되었다.

여러 경향들을 보편화한 우리의 목록을 열거함에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해석의 역할을 거의 간과하여 왔다. 성서적 해석학과 고전 알레고리는 서구문학을 통합하는데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더욱이, 규범(canon)을 해석하고 일반화하는 비판적 전통의 기반으로서, 이 두개의 관례들은 영국문학과 같은 서구문화의 후기적 여러 갈래들의 특징을 결정하는데 특히 도움이 된다. 후기의 문학은 보다 비판적으로 의식적이게 되고, 본유적으로 비교적이며, 고의적으로 코스모폴리턴적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기 문학의 순수한 본질은 해석학과 알레고리 전통에 대한 후기 문학의 흡수와 지속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들 광범위한 전통들은 초기 기원을 갖고 있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석학적이다. 필자는 호머 그 자신이 알레고리를 신봉하였거나, 혹은 어떤 의미에서 알레고리 연구의 주제가 된다고 주장하여 왔다. 이들 두개의 텍스트 해석 방식들은 한때는 표준적인 비평과정으로 확립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원 텍스트 그 자체가 구성되었던 방식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초기 문학의 본질을 결정하였던 중심적 기관이었던 로마카톨릭 교회의 체제는 대부분이 신학의 형태로 발전시킨 일종의 해석학적 활동에 의거하였다. 버질은 로마의 알레고리에 의하여서 만큼 호머에 관한 알레고리에 자신을 몰입하였다. 일찍부터 이 두개의 해석 방식은 결합되었다. 버질은 기독교의 해석학적 연구와 신플라톤주의적 알레고리학 양자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에 알레고리학의 중세적 전통은 그 자체가 전반적으로 버질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성서적 주해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완전한 알레고리적 문학을 잉태하였다. 이는 타소, 스펜서 그리고 듀 바르타스와 같은 르네상스 문필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타소의 비판적 이론은 이후의 문학적 업적, 특히 밀튼의 문학적 업적의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주안점은 이 모든 창조적이며 비판적인 성서해석적, 알레고리적 그리고 이론적 활동은 전통을 추상화하고, 위격화하고 그리고 보편화하는데 이바지하였다는 사실이다.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영국문학은 스스로의 비평을 개발하여 스스로의 자각을 할 때까지는 다른 나라의 문학을 모델로 하였다. 스스로의 비평적 전통이 성숙하였을 때, 영국문학은 자신의 본유적인 보편화하려는 경향들과 더불어서 스스로의 고전을 지속하게 되는 입장에 있게 되었다. 이는 이후 다가왔던 광범위한 자연주의적 사조에서도 지속되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일반적 경향, 가장 영향력있는 전통, 그리고 비평적 기교들에 관해 언급하여 왔다. 개별 문필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영국문학을 보편화하는데 기여한 여러 특정 주제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 주제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인 소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영국문학의 일차적 영향을 준 것으로 성경을 살펴보자. 하느님의 관념은 보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단독적인 화신도 보편적이다. 이러한 원리에 있어서, 우리는 개별적인 것의 보편화와 보편적인 것의 개별화 양자를 주시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표상은, 아담과 혼합되어, 중세의 보통사람(genus humanum)의 형태로든, (고전적 모델들이 강화된) 고뇌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영웅의 형태로든 혹은 18, 19세기 소설에서의 단일주제들의 형태로든, 개별적인 것의 등장을 위한 일종의 모델을 제공한다. 고전서사시에 대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회복은 이 인간의 집중화된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것은 자연및 신들과 그의 갈등에서, 그의 인생살이에서, 어떤 세계를 구축하려는 그의 노력에서 드러난다. 고전기 혹은 중세로 추적될 수도 있으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꽃을 피운 다른 소재들은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호작용, 존재의 사슬, 대응의 이론, 그리고 시간, 변덕 그리고 불사를 포함한다. 계몽주의는 이성이라고 명명되는 새로운 여신에 의해 지배되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철학적 보편성의 어휘를 도입하였다. 낭만주의와 후기낭만주의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 초기의 성서적이고 고전적인 소재들로 되돌아가서 혼돈과 창조라는 최초의 모습을 표상한 무질서와 질서의 신화를 각색하였다.

여러 시대를 망라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이고 감정적인 표현(topoi)이며, 이는 유럽이 아닌 다른 나라가 전형적으로 서구적인 것으로 간주하여온 것이다. 정치적 보편성은 제국과 민주주의의 관념을 포함한다. 감성적 소재들 중에서 사랑은, 성적이든 혹은 승화된 것이든, 아마도 가장 보편적인 것일 것이다. 하나의 주제로서 사랑은 중세의 로망스, 초기의 서정시, 많은 연극이야기, 그리고 소설을 지배한다. 초서, 스펜서, 세익스피어 그리고 밀튼은 모두가 그들 보다 앞서의 호머, 버질, 오비드 그리고 단테가 그랬던 것처럼 이 주제에 몰두했었다. 사랑은 정신적으로 혹은 에로틱하게, 희극적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신화적으로 혹은 사실적으로 여러 형태들을 취할 수도 있다. 윤리적으로 사랑은 건전하게 가정적일 수도 있거나 혹은 약간의 부정, 근친상간, 동성연애일 수도 있다. 하나의 주제로서, 사랑은 분명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다. 물론 어떤 면에서, 사랑은 또한 서구적인 것과 다른 보다 덜 낭만적이거나, 덜 에로틱하거나 혹은 정신적 문화를 구분 짓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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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영국문학은 그의 기독교적 요소와 주제의 심오함에도 불구하고 코스모폴리턴적은 아니다. 19세기에 일종의 연구주제로 소생하고 또한 다음 세기에는 간헐적으로 모방된 고대영국문학은 스키타이의 황금, 자이나교의 믿음, 에트루리아 문화와 같은 훌륭하지만 지역적인 특별한 부류의 요소들에 머물렀다. 전반적으로 고대영국문학은 너무 침울하고 숙명론적이다. 사실상, 인생은 차가운 대양 물결 위에 떠다니는 한척이 보트이며, 한 다발의 쓴 굴곡의 걱정거리이다. 하지만 인생은 또한 일종의 Fair Field of Folk이다. 랑글란드(Langland)는 기독교적 알레고리의 추상적 힘을 통해서 그의 개인적 통찰력의 미묘함과 즐거움을 위한 보다 균형잡힌 철학을 제시하였는데, 상당히 진지하게 그의 개인적 통찰력의 예민함과 명쾌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부두의 경작자’(Piers Plowman) 역시 다소 제한적이고 지역적이다. 그것은 보다 커다란 인습들에 의해 제한적이며 또한 사뮤엘 다니엘이 그의 저서인 ‘압운의 옹호’(Defense of Rhyme, 1603)에서 “이후 다른 국민들에게도 유사한 영광의 욕망을 일깨웠던 기적과 세계의 불사조라고 불리었던 이탈리아의 당대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이다. 이 영광의 동기는 다니엘의 연령을 초서의 연령보다 더 앞선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탈리아의 활력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초서는 이탈리아를 방문하였고 어쨌든 단체, 페트라르크 그리고 보카치오의 작품에 심취했었다-다른 중세영국의 작가의 작품에서가 아닌 바로 초서의 작품에서이다. 초서는 사랑의 상상력에서 리바이벌 서사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중세 풍자시로부터 로망스에 이르기까지 여러 중세의 형식들에 통달하였다. 하지만 초서는 이 대부분의 프랑스적 전통을 영국적 사실주의와 당시에 영국에서 부족했던 세련된 아이러니로 활력을 불어 넣는다. 고전적이고 보다 당대의 대륙적 모델들에 더해서, 초서 자신의 포괄적 천재성 또한 그 자신의 보편성에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초서는 세익스피어와 필딩(Fielding)과 같은 존재이다.

다른 유형의 보편화가 우리가 신비와 도덕이라고 명명하는 드라마에서 일어난다. 중세의 신비적 연극들은 그 도식으로 기독교적 월력을 취하고 주제로 생과 죽음의 신비 그리고 그리스도의 환생을 다룬다. 월력의 특징은 이들 요소들을 보편적 교회의 문화적 의식과 결합하고 과정의 주제들을 성경과 결합한다. 따라서 신비적 연극은 관객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관객의 개인적 신앙의 강화에 의해 내외적으로 보편화된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중세의 도덕 연극은 어떤 단순한 생각을 드라마화하는 다소 조야한 형식으로서 이를 알레고리의 도식으로 전개될 때는 어쨌든 우리에게 어떤 특정 이미지와 보편적 의미를 즉시 우리에게 부여하기 위한 무대의 힘을 보여준다. 영원하지만, 집단적이며 개인적인 인물인 ‘모든사람’(Everyman)의 원조적 영웅은 보편적 시간(창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의 역사)의 연속을 따라서 주어진 어떤 시점에서 우리 앞에 주어진다. 모든 도덕연극은 신의 개념의 대우주에 대한 개인의 소우주를 설정하는 보편적 주인공과 보편적 플롯을 갖는다. 모든 것은 성경의 중심적 원리인 몰락 그리고 구원과 관련된다. ‘모든사람’(Everyman)은 다소 비성경적인 인물인 보편적 재앙으로서의 죽음의 신과 같은 여타의 중세적 유형과 함께, 일곱 개의 지옥에 떨어질 죄와 같은 전통으로부터 도출된 알레고리적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비서구인 관객에게 조차도 매혹적인 이 연극은 여하간에 단테에게 알려진 어떤 문제를 반영한다. 지옥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죄는 구원 혹은 천국 보다 더 쉽게 표상된다.

오덴(Auden)은 한때 기독교 예술이 술어상 모순임을 주목하였다. 그러한 명칭의 고대 영국시에서의 그리스도의 표상이 시사하듯이, 그리고 중세문학에 대한 다른 곳에서의 그의 묘사가 확인하듯이, 그러한 영적 주제의 직접적으로 예술적인 구현은 문제를 야기한다. 아마도 가장 좋은 해결책은 완전체인 그리스도를 불완전한 세속의 인물과의 융합을 겨냥한 병치이다. 말로리(Malory)가 성취한 것은 바로 영웅적 가치 내에 그와 같은 기독교인의 승화이다. 즉 모르테 다르투르(Morte Darthur)의 서문에서 칵스튼(Caxton)이 그가 가장 위대한 것으로 지목하는 말로리의 영웅을 이해하기 위한 문맥으로서 3명의 이교도, 3명의 유태인, 3명의 기독교인이라는 9명의 명사들을 열거했을 때 그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그와 같은 소재들의 병치였다. 왜냐하면 아더는 각각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언가를 흡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헥터, 알렉산더대왕 그리고 율리우스 시저, 조수아의 예언적이고, 제왕적이며 그리고 지배적인 힘, 데이비드와 유다스 마카비우스, 샤를르마뇨의 실제적 힘과 낭만적 호소력 그리고 불료뇨의 고트프라이로부터 각각이 신비적이고, 군사적이며 그리고 정치적인 장점을 흡입한다. 말로리는 심지어는 보다 깊은 원형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지만, 그는 영웅적인 것을 신성하게 하고 종교적 소재를 세속화하기 위해 분명하게 아더와 그리스도의 인물들을 융합한다. 아더는 죽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의 무언가가 여러 면에서 영국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더왕은 죽지 않았으며 단지 우리의 주인인 제수(Jesu)의 의지에 따라서 다른 장소로 갔을 뿐이다라고 말로리는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다시 올 것이며 그는 성십자가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되지는 않을 것이다.”“오히려 이 세상에서 아더왕은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라고 말로리는 말한다. 그의 영웅의 세속적 수립을 위해 종교적인 것을 명백하게 거부함을 통해, 말로리는 사실상 이를 양자의 방식으로 하게 된다. 이 신에 버금가는 영웅의 특징으로만 한정지을 때(그의 플롯은 너무 느슨한 에피소드이다), 말로리는 대륙의 서사시 전통에서의 통일성과 깊이를 성취한다. 적어도 밀튼을 위협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단지 동시대 사람들 만이 완고한 랄리프(Ralegh, 1552?-1618)를 변덕스러운 돈느(Donne, 1572-1631)로부터 구분한다. 하지만 어떤 단순한 정형화된 표현(topos)의 처리에 있어서의 차이는 두개의 시대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세계사의 제1편에서, 랄리프는 성서적 근거와 중세적 줄기에서 다음과 같은 기준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신에 의해 조립되고 빚어진 인간은 보편자의 추상적 혹은 모범적, 혹은 간략한 이야기였다,......이는 이성의 힘과 능력 그리고 여타의 능력이 부여되었을 때, 인간은 그에 의해 세계와 세계 속의 모든 신의 창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그리고 인간의 신체라는 작은 도식 속에 어떤 보편자의 표상이 있기 때문에,.....인간은 소우주 혹은 작은 세계라고 불리어졌다.

랄리프는 계속해서 대응의 원리를 확립한다. 즉 그것은“4개의 안색은 4개의 요소와 유사하다. . . 인간의 7개의 연령은 7개의 식물과 유사하다.” 여기에서 “또한 인간의 작은 세계는 보다 보편자와 같이 비교된다.” 이와같은 보편자와 개별자의 균형있는 견해에 불만을 품은 돈느(Donne)는 후자를 강조한다. 돈느는 그의 4번째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작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신을 제외하고, 인간은 무로 돌아가는 아주 사소한 존재이다.”달리 말하면, 인간은 세계 보다 더 크며 인간 그 자신이 어떤 보편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세계와는 다르다. “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대답하지 않는 그 무엇도 갖고 있지 못하듯이, 인간은 세계가 표상하지 않은 많은 조각들을 갖고 있다.”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어떤 보편자와 같이, 인간은 마음의 작용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들의 창조자로서 나는 좁은 감옥 안의 메스꺼운 침대 안에 있다. 어느 곳이든 그리고 나의 피조물의 어느 누구든, 나의 생각들은 태양과 함께 하며, 그리고 태양을 넘어서 태양을 추월하며, 그리고 태양을 어느 곳에서든 한 걸음으로, 한 스텝으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창조주의 라이벌이며, 중요도에서 신학의 보편성과 대적하는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의 개별자이다. 돈느는 그의 주변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우주론, 새로운 과학 그리고 새로운 내적 덕목의 윤리학과 함께, 새로운 우주를 가정한다. 그와 그의 연인은 그의 중심(“태양의 떠오름”)에 위치하고, 그들의 눈은 이 새로운 세계를 지각하고 수용한다(“규범화”). 결국 그의 시는 우주의 성찰과 우주 그 자체이다. 이는 말라르메의 방식과 같은 맥락이다. 랄리프와 돈느의 중간 세대에 위치한 사람이 세익스피어(1564-1616)이다. 이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 보다도 일관성이 부족한 세익스피어의 시각은 때로는 조화적이고, 때로는 부조화적이고, 때로는 희극적이며, 때로는 비극적이다. 세익스피어의 영웅들은 종종 비극적인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이들 영웅들이 그들 자신의 우주를 일반적 우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구시대 우주의 재탄생이 아닌 새로운 우주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이 경우 성경과 고전은 산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은 텍스트를 이용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새로운 것을 잉태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이 시기에 6번이나 영어로 번역되었던 성경은 본질적으로 충분히 고취되기에는 미흡한 것이었지만 신선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페트라르크가 로마를 재발견하고 단테를 통해 어떤 목소리를 발견하였듯이, 와이아트(Wyatt), 서레이(Surrey) 그리고 시드니(Sidney)는 페트라르크를 재발견한다. 그것은 번역도 아니고 오리지날 시도 아닌 새롭고 통합적인 작품들을 통해서였다. 고전의 여러 버전들이 요청되었고, 이들은 차례로 과거를 새로운 것과 결합하는 방법에 관한 보다 많은 모델들을 제공한다.

골딩(Golding), 채프만(Chapman) 그리고 캄피온(Campion) 만큼이나 시드니는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창조적 번역가들 중 한 사람이다. 시드니는 때때로 외국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하였지만, 그의 주요한 기여는 이국적 장르를 영국문학의 주류로 자리 잡게 한데 있다. 시드니는 아카디아(Arcadia)에서 전원적 로망스를 그려내고, 아스토로필과 스텔라(Astrophil and Stella)에서는 일련의 소네트를 그려낸다. 마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나 한 것처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호레이스를 그 자신의 견해에 따라서 융합해서 영어로 최초의 보편적 시론을 우리들에게 제공한다. 모레(More)의 유토피아 세계처럼, 시드니가 창작했던 모든 세계는 이 세계 보다 우월하며, 위계적이며, 전체적이며, 평온하다. 고전적인 우주론에 부합해서 모든 과학과 예술은 architechtonike, 즉“첩지식”을 향해 나아간다. 이는 굉장히 야심적이며 실제적인 목표이자, 자아, 윤리학 그리고 정치학을 포함하는 목표이다. 시드니에게 있어서 시 그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다. 즉 시는 “모든 지식, 논리학, 수사학, 자연철학과 윤리철학”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포괄한다. 절충적인 자세로 시드니는 고전이론가들 뿐만 아니라 벰보(Bembo), 스칼리제로(Scaligero), 클라우세루스(Clauserus), 란디노(Landino) 그리고 “시인 자신들”(the poets themselves)의 견해들을 집대성한다. 그는 시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문화국민은 이를 경멸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시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다.

시적으로 시드니는 3가지의 주요 보편적 주제인 시간, 죽음 그리고 사랑을 환기함에 의해 그의 “옹호”(Defense)를 종결짓는다. 이는 세익스피어도 그의 소네트에서 시와 결합했던 3가지 주요 보편적 주제이기도 하다. 시드니 보다 1세기 전에 레오나르도(Leonardo) 역시 다음과 같이 이 세가지 요소들을 연결하였다:

오 시간이여, 모든 사물을 소비하는 그대! 오 부러운 나이여, 그대는 모든 사물을 연륜이라는 단단한 이빨로 모든 사물을 파괴하고 삼키고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죽음에 이르고 있구나! 헬렌이 거울을 보고 나이가 그녀의 얼굴에 새긴 시들을 주름살을 보았을 때, 그녀는 울었고, 또한 왜 그녀가 두 번이나 휩쓸려 갔는가를 스스로 반문하였다.

시간과 죽음은 절박하고 보편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주제는 사랑만큼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고전적 연령에 있어서 헬렌은 적절한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헬렌을 다시금 소생시키고자 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레오나르도는 스스로 다른 모델들을 찾아 나섰고, 이들 중에는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도 있으며, 일부는 헬렌 보다 더 사악하고 보다 더 신비롭다. 여러 유형의 어떤 확산, 즉 고전적 신화를 능가하는 어떤 확산이 진행된다. 간략히 말해서, 우리는 스펜서, 세익스피어 그리고 밀튼이 그 외의 소네트 시인들과 신학자들과 함께 더불어 모두가 기여했던 새로운 신계보학을 목격하게 된다.

세익스피어가 일찍이 지적하였듯이, 사랑은 주요한 주제일 수 있었다. 세익스피어는 때로는 현실적이며, 때로는 비극적일만큼 현실적이지만, 전반적으로는 낭만적이다. 그의 가장 위대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는 작품들 중에는로미오와 줄리엣,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유혹 혹은 보다 가벼운 작품으로 한여름 밤의 꿈, 당신이 좋아하는데로 그리고 공연한 법석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밀튼은몰리에르에 보다 가까우며 소설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주제는 자국 내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밀튼은 낭만적 성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밀튼은 그의 동료로서 보편적 문필가였던 세익스피어의 보편적 힘, 세익스피어의 절충주의 그리고 놀랍게도 세익스피어의 통상적 감각을 공유하였다. 밀튼에 관해 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논하고자 한다.

지금 스펜서를 논하는 것이 어떠한가? 발미키(Valmiki), 오비드(Ovid) 그리고 단테 이후, 그리고 로망스와 궁정의 사랑이야기에 관한 열정적 시인들 이후, 스펜서는 사랑에 관한 가장 위대한 시인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스펜서는 이 모든 사람들을 능가할 것이다. 단테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오비드 보다 더 윤리적이며, 로망스의 작가들 보다 더 철학적인 스펜서는 또한 이들의 많은 장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그는 단테의 영적인 것, 오비드의 다양성, 아리스토의 유머를 포함하고 있다. 스펜서는 그 자신의 시스템을 고안하기 위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계승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스펜서의 다양한 소스와 복합적 플롯은 어떤 단일한 전통이나 이야기 보다도 더 많은 개별성을 그의 알레고리에 부여하고 있다.

물론 스펜서는 사랑의 시인으로 머물기에는 훨씬 많은 것을 했다. 그의 요정의 나라에서 스펜서는 완전한 상상력의 세계를 수립하였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달리 말하면, 그 세계는 환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실제의 세계이다. 이는 사진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을 실제로 간주하는 근대의 독자들에게 어떤 문제를 야기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와 같이, 이 세계는 스펜서가 알고 있는 모든 진리와 가치를 동원하여 그가 도출한 이상적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요정의 여왕은 누구인가? 스펜서에게 일년에 고작 50파운드만을 보상해 줌에 의해 그 사실을 인정했던 엘리자베드는 분명 아니다. 그녀의 아더적 구현에 있어서, 그녀는 왕의 배우자로서 보다 영광스런 인물인 글로리아나로 불리어진다. 이는 또한 왜 밀튼이 또다른 주제를 선택했는가 하는 이유에 대한 답변을 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세계의 일부에 불과한 이브와는 달리, 요정의 여왕은 세계를 파악하고, 많은 고전과 기독교의 여신들 그리고 스펜서 그 자신이 익숙했던 여러 알레고리적 인물들(지혜의 신, 자연의 신, 변덕의 신)을 흡수한다.

스펜서는 여성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의 시는 완성되지 않았다. 스펜서는 그의 시의 길이를 두배로 하려고 계획했다가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스펜서의 작품은 한 젊은이의 작품이다.) 어쨌든 이 시인의 보편성, 그의 포괄성, 그의 추상력, 그의 보편 윤리적 가치는 아마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단테만이 스펜서의 라이벌이 될 것이다. 어떤 때는 스펜서가 심지어는 버질 보다도 더 위대한 시인이라고 우리는 느낄 때가 있다. 스펜서는 계몽주의적 자각과 예의의 전형이다. 그에 비해서 밀튼은 부족한 것처럼 여겨진다.

16세기 영국문학에서의 보편적 요소에 관한 어떤 논의도 말로위(Marlowe)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될 것이다. 파우스투스 박사(Dr. Faustus)는 말로위의 다른 작품 보다 탁월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당대의 문화적 그리고 철학적 문제를 탁월하게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문제는 오늘날 보편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에, 말로위의 희곡은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작품에 견줄 수 있을 만큼 보편적 호소력을 획득하고 있다. 이들 두 작품은 전통세계와 근대세계 사이에 끼어있는 인간을 기술하고 있다. 말로위의 동시대인들에게 있어서, 파우스투스는 로마교회를 떠난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될 수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파우스투스는 신앙의 길에서 벗어난 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말로위의 동시대인들에게 있어서, 파우스투스는 과학에 호기심을 갖는 자들이나 혹은 세계는 이미 위계질서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다. 돈느와 마찬가지로, 파우스투스는 인간이 신과 같지만 여전히 신의 벌의 객체로 보았다. 보다 일반적으로 얘기한다면, 파우스투스는 인간은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여야만 하거나 혹은 개인은 스스로에 의지하여야만 하고, 장의사는 혐오스러운 것임을 깨달은 사람들을 나타낸다.

세익스피어의 팔스타프(Falstaff)와 햄릿, 세르반테스의 산초와 돈키호테, 바이론과 모차르트의 돈주안과 마찬가지로, 말로위의 (그리고 후에 괴테의) 파우스트는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과 그리스도의 원형에 의존하는 근대의 보편적 신화이다. 그들의 고뇌에서, 파우스트, 햄릿 그리고 주안 모두는 계몽되고 성경 보다는 세속적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근대의 독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와 같은 고뇌를 짊어진다. 아더라는 인물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보편적 호소력은 부분적으로는 어떤 원형의 추구 때문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막바지에 밀튼은 그의 주인공들 중 한 사람인 아담을 또다른 그리스도로 명명함에 의해 이러한 원형을 명료하게 한다.

우리의 르네상스 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주인공은 보통사람(Everyman)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파우스투스, 햄릿, 아담 그리고 그리스도는 분명 그렇게 표상되고 있다. 윤리학적으로는 명백히 기독교도인 세익스피어는 작품에서는 세속적이며, 그의 보편적 호소력은 아마도 그 때문에 더 강한 것 같다. 여기에는 그의 다양성의 요인도 있다. 왜냐하면 각 시대에 또 다른 세익스피어가 있듯이, 여러 문화는 각각이 나름대로 각 문화가 선호하는 연극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햄릿은 이러한 법칙에 예외이다. 왜냐하면 햄릿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보편적 인기를 누려 왔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먼데 있지 않다. 햄릿이란 성격은 햄릿 희곡과 같이 많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햄릿에게 있어서 우리의 자아를 제외한 모든 것은 문제투성이다. 우리와 정신세계와의 관계, 우리와 우리의 가족 그리고 동료들과의 관계, 우리와 그 외의 의미 있는 여타의 것과의 관계는 모두가 그렇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햄릿의 지략적인 해결책들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세익스피어가 여기에서 기술하고 있는 상황이 보편적으로 일반적인 인간의 상황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희곡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의심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벤 존슨은 때때로 세익스피어가 부족한 것, 즉 박학, 예의, 윤리적 리얼리즘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도덕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경구, 풍자시, 대중연극 그리고 가면극에 많은 교훈이 있다. 어떤 관점에서는 그의 작품 볼폰(Volpone) 역시 - 그의 동물우화의 도식에서, 그의 이기적인 주제에 있어서 고전적 전거를 채택한 그의 희극적 소재에 있어서 - 보편성을 띤다. 하지만 존슨이 증명한 것은 보편적일 수는 있지만 특별한 호소력을 지니지 않은 작품이다. 왜냐하면 시는 단순히 근사한 절차와 판단의 기록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익스피어와 같은 열정, 정신 그리고 영감도 아울러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들은 모두가 어떤 세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보편적인 르네상스의 서사시를 쓴 사람은 바로 밀튼이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으로 글을 썼던 루크리티우스, 버질, 오비드와 같은 로마의 선구자들과는 달리, 밀튼은 그가 살던 시대의 보편주의자들과도 유사성을 갖지 않는다. 베이컨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과학지식이 근거하고 있는 원리 혹은 최소한 어떤 과정을 발표하였다. 홉스는 정치학 이론의 분야에서 유사한 과정을 탐구하였다. 데카르트는 어떤 보편적 철학 과업에 몰두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밀튼은 태고적이다. 즉 그의 작품은 신비적이며, 성서적이며, 신학적이다. 밀튼의 이중적 관점을 볼 때, 밀튼은 우리가 랄레프에서 돈느에 이르기까지의 진보를 확장한 토마스 브로우니(Thomas Browne)와 다음과 같은 입장과 유사하다 : “내가 어떻게 소우주이거나 혹은 조그만 세계인가를 깨닫고자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스스로 위대한 것 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을 발견한다.” 브로우니는 밀튼의 내면성과 포용력 양자를 예언한다. “내가 보고 있는 세계는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우리 자신의 내부에 아프리카의 모든 것과 아프리카의 불가사의가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브로우니와 마찬가지로, 밀튼은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보편적이다. 또한 전거의 문제에 있어서 밀튼은 다음과 같이 브로우니의 독립적 정신을 공유한다 : “나는 나의 종교의 법칙을 로마나 제네바로부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성이 명령하는 바에 따른다.”

자신의 서사시를 위해 밀튼은 호머의 트로이의 멸망 만큼이나 숙명적인 것으로서 적대적인 성서적 신화를 추구한다. 아담을 타락하게 했었던 힘에 대한 그리스도의 저항에서 밀튼은 오딧세우스의 귀로에서의 속죄적인 유사성을 발견한다. 호머의 해석학과 성서적 알레고리로서 그것은 밀튼의 예술에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결점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불행을 중단하기 위해 그리고 밀튼이 보았던 천국으로 가기 위해 원죄와 십자가를 치료해줄 알약을 삼켜야만 한다. 미스터리는 이를 행할 수 없는 자들도 어떻게 여전히 밀튼을 찬미하는가이다. 여기에서 밀튼은 무심코 보편적인 단테의 편에 선다.

어떤 의미에서는 엄청난 코스모폴리턴인 밀튼은 에즈라 파운드처럼 교육적 열망에 있어서 편협적이다. 그의 교육적 열망은 수십개의 언어로 된 사전이자 보급서인 성서와 고전의 백과사전 발간으로 향하게 한다. 밀튼은 한 17세의 소녀와 결혼하고 나중에 그녀를 버린 것을 제외하고는 호머와 같은 실명의 이를 때까지 독서를 결코 중단한 일이 없다. 왜냐하면, 밀튼 그 자신은 거대한 공간이며, 헤시오드의 혼돈의 지점까지 역사를 되감기하였으며, 페이터(Pater)의 내적 감성으로의 용해에 이르기까지 전진하였기 때문이다. 밀튼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즉 밀튼은 모든 가능성들을 포괄하고 있다. 하지만 밀튼 그 자신은 이들 가능성 중 하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밀튼은 아담과 이브로서, 사탄으로서, 신으로서 체계적으로 그 자신을 재상상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밀튼의 주요 작업이며 그의 주요 영역이다. 그리스도와 삼손은 돔 건축으로 치면 돔과 지주사이의 아치형 부분인 펜덴티브에 해당한다. 밀튼은 세계와의 관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밀튼은 바로 세계로부터 그리고 그의 시대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레이크가 보았던 바와 같이, 밀튼이 관계하고 있는 것은 통찰력 있는 호머로부터의 관계였다. 밀튼은 호머의 음성을 시 보다는 산문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모방하고 있다:

나는 내가 마음 속에서 어떤 스스로 잠에서 깨어난 힘센 사람처럼 스스로를 포효하고 자신의 불굴의 머리털을 흔드는 고귀하고 강력한 민족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겁많은 운집한 새들의 소음이, 여명을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푸드덕 거리고 그 민족이 의미하는 것을 보고 경탄하고, 또한 이들 새들의 부러운 재잘거림 속에서 분열과 쪼개짐의 시기를 예언하는 동안, 나는 내가 그 민족을 그의 힘찬 젊음을 외치고 충만한 정오의 햇살에 그의 총명한 눈을 불태우며, 천국의 광채에 휩싸인 연못 그 자체를 보고 그의 오랫동안의 피곤한 눈을 정화하고 균형 잡는 한 마리의 독수리로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글라스 부시는 밀튼을 세익스피어 다음가는 2번째 영국의 시인으로 간주하였다. 인생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에 의거해 볼 때, 밀튼은 사실상 최고의 영국시인이거나 혹은 4번째의 영국시인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들이 밀튼과 동일한 신앙을 믿는다면, 밀튼은 최고의 시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초서, 스펜서 그리고 세익스피어가 인생을 사는 법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왔던 것들을 생각한다면, 밀튼은 아마도 이들 다음의 위대한 시인이 될 것이다.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기반하고 있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밀튼이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장문의 시로서 밀튼의 추종하는 주요 시인들은 블레이크, 워즈워드 그리고 바이런이다. 이들 각각의 시인들은 밀튼을 보다 더 보편화하기 위한 어떤 독특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블레이크는 “보편적 인간”(Universal Man)을 창조한다. 그의 보편적 인간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흡수하지만 신을 대체하며 블레이크가 조롱했던 고전시대의 신들을 대신한다. 이러한 “신성의 인간형태”는 우주를 망라하고 우주의 여러 발전단계를 총괄하며, 그에 의해 역사를 통괄한다. 블레이크의 목표 중에는 “보편적 형제애”(universal Brotherhood)와 “보편적 시적 천재”(universal Poetic Genius)가 있는데, 그는 이를 모든 사람에게 상상력의 옷을 입히기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시적 천재에 있어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워드워즈는 자연과 그 자신의 마음에서 보편적 원리를 발견한다. 그의 작품프렐루드는 그가 “어떤 시인의 마음의 성장”이라고 부제목을 달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밀튼의 내적 음성을 모방하면서, 실낙원의 주제를 이 시인 자신의 우주에 대한 개념의 발전으로 좁힌다. 우주의 이와 같은 평등화 속에서, 워즈워드는 블레이크를 추종하며 그리고 이후의 휘트먼을 예고한다. 블레이크와 마찬가지로, 워즈워드는 그 자신의 마음이 자연을 변모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앞서 우리가 사용했던 용어를 사용한다면, 만일 소우주가 대우주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면, 소우주는 대우주를 흡수한다. 워즈워드는 이와같은 자연의 탐구 과정에서, “나는 보편적 사물들을 추구하였다”(프렐루드, III, 109)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수반되는 문장에서, 워즈워드는 그러한 세계를 “최초의 낙원,”“지고의 진리” 그리고 “신성 그 자체”로 재창조한다.

돈 주안에서 바이런은 인간의 몰락의 희극적 환원을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그는 각각의 이어지는 에피소드와 함께 그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죄로 몰락한 아담과는 달리, 주안은 단지 경험으로 몰락한다. 바이런의 시와 같이, 그리고 인생 그 자체와 같이, 경험은 제한이 없다. 이전에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돈 주안이라는 형식은 근대의 팽창하고, 유기적이며 그리고 불완전한 우주의 개념을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다. 근대의신비적 인물로서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이, 바이런의 주인공은, 물론 그 스스로가 아담과 오딧세이적 특징들을 수집하고 결합하고 있지만, 성서적이고 고전적인 모델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주안은 보편적인 것과 자전적인 것 양자를 표현하고 있다. 후자의 자전적 방식은 그 자체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되게 되었다. 프렐루드와 마찬가지로, 돈 주안 성장소설(Bildungsroman)과 관련되어 있다. 블레이크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지리적 보편성을 향한 바이런의움직임은 유럽을 현존하는 17편으로 사려깊게 포괄하였지만, 아마도 그 나머지에 있어서는 훨씬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 83편으로 투영하였다. 바이런은 그의 불굴의 근대성에도 불구하고, 블레이크와 워드워즈 양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는 외면당한 아리오스토와 같은 낭만적 모델들에 탐닉한 장편시의 고급전통을 소생시키고 지속시킨다. 오늘날의 형식에서 살펴 보더라도 돈 주안은 완전한 작품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영국에서의 보편적 요소를 고려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유럽 대륙을 간략하게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적 편협성으로부터 탈출에 진력을 다했던 바이런과는 달리, 괴테는 쉴러가 “독일 특유의 시”라고 기술했던 작품에서, “독일에 보편적인 시”로 조정될 수 있는 한 귀절을 포괄하였으며, 사실상의 독일문화를 정의하였다. 왜냐하면 괴테는 국민문화의 작품을 성공적으로 고안하고 실행했던 몇안되는 서구문학가들 중 한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서 우리는 버질, 카멘스(Camoens) 그리고 헨리아드(the Henriad)의 세익스피어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의 버질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카멘스나 헨리아드의 세익스피어와는 달리, 괴테의 작품은 또한 쉴레겔이 괴테의 작품에 이어서 나온 초기낭만주의자(Fruhromantiker)에 관해 말할 때, “진보적인 보편시”(eine progressive Universalpoesie)라고 기술했던 것을 성취하였다. 달리 말하면, 괴테는 독일문화를 요약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세계 문화에 관한 통찰력을 투영하고 있다. 세계문학(Weltliteratur), 혹은 보편문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말했던 사람은 바로 괴테임을 우리는 기억한다. 19세기 중반에, 보들레르는 시인을 “보편적 유추의 끝없는 원천”(l'inepuisable fonds de l'universelle analogie)을 끌어 들이는 “번역가, 해독자”(un traducteur, un dechiffreur)로 정의하면서, 문학의 보편적 가능성에 관한 또 다른 의미를 도입한다.

하지만 영국의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서구문학에서 많은 보편적인 것은 보편성에 관한 정의 없이 그리고 보편성 그 자체가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동의 없이 발전하였다. 역설적으로, 서구문학이 개별성으로 전환을 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개인적 경험과 사실적 표현, 보편성은 논의의 주제가 되었다. 이러한 개념의 근대사에서 몇 개의 사례들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16,17세기에 문필가들은 모방의 모델로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부흥시킨다. 점차적으로 관심은 이들 고전들이 산출되었던 역사적 상황으로 발전된다. 이는 또한 모든 역사적 시대와 문화의 작품들에 깔려있는 보편적인 것의 정의를 하게 한다. 여기에서 과학과 이성철학은 보편성에 관한 문학이론이 형성되도록 도와준다. 보편성의 이론은 자연, 이성 그리고 진리와 같은 가치들을 수용한다. 이는 그 이전의 아담, 그리스도 그리고 신과 같은 보편성을 뒤집는 것이다. 17세기와 18세기 후반에 일종의 규범이 수립된다. 그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호머, 버질 그리고 오비드, 그리고 영국문학사의 초서, 세익스피어 그리고 밀튼이다. 이들은 사뮤엘 존슨의 명언에 나오는 자연(nature), 혹은 보편적 자연(general nature)을 표현한 사람들로 인용된다.

18세기 후반에, 비평가들은 고전으로부터 이탈하는 작품들을 옹호하기 시작한다. 고대와 근대 간의 논쟁은 계속되고, 근대는 점차적으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부수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그것은 규칙(rule)에의 관심으로부터 보편적인 것(the universal)으로의 변화이다. 후자는 예술의 결정적 특징이자 규범원리로 새롭게 간주되었다. 고전적 모델의 모방은 거부되고 현실의 재현이 옹호되게 된다. 사람들은 창조적 과정, 시인의 상상력, 시인의 천재(genius)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천재(genius)는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힘으로 간주되었으며, 점차적으로 보편성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또한 논의의 초점은 예술작품의 관객(the audience)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보편적 휴머니티의 개념, 본성적 인간존재의 개념(루소), 예술작품에 대한 인간의 반응 모두가 강조되게 된다. 시인과 독자는 보편적 휴머니티를 공유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고대에서 근대, 자연으로부터 예술, 시로부터 시인의 내면으로 그리고 시인에 감응하는 관객으로의 초점의 이동에 있어서,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수용태세가 발전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안점은 더 이상 시의 장르, 주제 혹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것, 개별적인 것, 불가항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문학에 대한 우리의 탐구에 있어서 이제는 최초로 보편성을 정의하였던 영국의 신고전주의 비평가들로 되돌아 가보자. “극적인 시적 연감에 관한 논문”(1668)에서 드라이든은 그의 대화자들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기술한다: “잘 말해지는 것은 모든 언어로 촌철살인이 된다; 그리고 번역에서는 중요한 것이 놓칠 수 있지만, 원문으로 읽는 자에게, 내용은 여전히 동일한 것이 된다....”달리 말하면 어떤 텍스트의 본질은 보편적인 것이며, 그 텍스트의 언어적 표현은 일시적인 것이다. 드라이든은 또한 세계문학을 위한 기초로서 번역의 사용을 위한 길을 개척하였던 점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다. 다른 주요 시인들과는 달리, 그러나 포프(Pope)와 마찬가지로, 드라이든은 그의 인생역정의 상당 부분을 고전을 번역하는데 역점을 둔다. 하지만 드라이든은 또한 근대적인 것, 즉 어떤 새롭게 부상하는 보편적 가치의 신봉자이기도 하다. 세익스피어를 고전적 모델들과 적절치 않게 비교했던 존슨과는 달리, 드라이든은 이 위대한 시인의 근대성을 옹호한다. 존슨과 마찬가지로, 드라이든 역시 세익스피어의 포괄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 “세익스피어는 매우 근대적인 사람이며, 아마도 이제 과거의 시인들은 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포괄적인 작가를 갖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산문과 시적 드라마로 된 드라이든의 원작들은, 근대성에 대한 드라이든 자신의 경외를 강조하고 있지만, 보편성에 대한 그 자신의 비판적 옹호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밀튼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우주론적이고 포괄적인 구도와는 달리, 그의 처음 주요 후계자들의 작품은 훨씬 작은 스케일을 갖고 있고 세부적으로 훨씬 개별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드라이든의 작품은 당대의 작가이자 그의 작품 순례자의 전진(The Pilgrim's Progress)에서 성서적 알레고리의 대우주를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경험의 소우주로 축소한 존 뷰년(John Bunyan)의 작품과 같이 부르조와적 표현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한다. 개인적이며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한 강조는 물론 이 시기에 등장한 가장 독창적인 형식인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며, 또한 다음 세기의 드포(Defoe), 리차드슨, 필딩, 스턴 그리고 오스텐과 같은 많은 주요 산문 작가들에 의해 실천된 형식이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독일적 개념으로 보았을 때 교육(Erziehung)개발(Entwicklung)과 같은 보편적 국면의 경험을 나타내고 있다.

19세기에 “보편적”이라는 술어는 가치의 척도로서 분명하게 사용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어디슨(Addison)은 실낙원에 관해 “밀튼을 지배하는 위대한 도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또한 가장 유용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또한 존슨이 “이 시가 그의 주제의 본성에 의해 다른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보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흥미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디슨에 의해 분명하게 언급되었다”라고 맞장구를 치게 된다. 여기에서 “흥미있는”은 존슨에 의하면 “지식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끄는”을 의미한다. 존슨의 다음 문장을 보면 이는 명백하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를 통해 아담과 이브와 동일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또한 자신들로 확장되는 선과 앙에 참여하여야만 한다.”존슨과 어디슨 양자에게 있어서, 보편성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으로 참인 것으로 인정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존슨은 세익스피어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그 자신과 드라이든이 취했던 용어의 확장으로부터 후퇴한 셈이 된다.

모든 18세기 작가들이 전적으로 이 새로운 원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존슨 보다 더 비관적인 스위프트(Swift)는 보편성의 가치에 관해 양면가치적인데, 특히 보편성의 가치가 과학적 유토피아 정신을 촉진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예를 들면, 걸리버 여행기의 제3장에서, 스위프트는 영생을 위한 처방인“보편적 약”을 포함하여 보편적 처방과 치료를 위한 그가 설정한 주인공의 열정적인 희망을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스위프트는 보편적 언어, 보편적 왕국의 관념과 같은 영생의 염원을 단지 이것이 보편적이라는 이유로 조롱하였다. 스위프트는 스스로의 이상주의적 커리큘럼에서 수학을 포함하고 있지만, 보편적 법칙에 의거하고 있는 단단한 이론의 과학들을 배척하고 있다. 통이야기(The Tale of a Tub)에서 스위프트는 소우주를 대우주로 대체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혹은 자연적 생각의 과정에서, 모든 인간을 정확히 동일한 길이와 넓이, 그리고 그 자신의 높이로 환원하는 것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상상한 적이 있는가?”

동시에,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걸리버 여행기는, 아마도 모어의 유토피아 이래로 어떤 작품 보다도 더 강력하게, 보편성의 원리를 지지하고 있다. 이 작품의 지리적 범위, 인간의 선과 악의 유형학, 감각적인 보통인간(l'homme moyen sensuel)의 개념, 이 모두는 이러한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젊은층과 노년층의 독자들에 의한 이 책의 범세계적 수용은 이 책의 보편적 호소력을 증명하고 있다. 사실상 스위프트는 명시적으로 고전적 혹은 기독교적 가치에 의거함이 없이 보편성을 성취한 최초의 근대적 서구의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 세익스피어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존슨 박사가 한 말, 즉 우리가 거인과 소인들의 원리를 파악하였을 때, 우리는 이책의 본질을 알게된다는 말은 제1부와 제2부의 중심적 생각에 해당하지만, 이 책의 보편적 매력의 원천으로 간주하기에는 부족하다. 역설적이게도, 절대성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든 혹은 우리의 통상적인 초보적 경험이든, 스위프트가 “일반적 본성”(general nature)에 어필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세르반테스의 부적절한 이상주의자와 살찐 현실주의자의 도식을 너무 단순한 것으로 간주하는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존슨은 스위프트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있지 못하거나 혹은 그의 천재성을 질시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라셀라스(Rasselas)가 그의 철학적 일반화에 있어서 보편적이라면, 걸리버 여행기는 그것이 갖는 호소력에 있어서 보편적이다: 즉 모든 사람은 말할 수 있는 동물들에 대해 흥미가 있다.

알렉산더 포프는 영국문학의 발달에 있어서 전환점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포프는 일반 원리 그 자체이며, 또다른 의미에서는 개인적 경험 그 자체이다. 그의 주요 작품들 중 2개, 즉 비평에 관한 논고 그리고 인간에 관한 논고는 근본적으로 보편자와 관련하고 있다. 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처음에 자연이 온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전히 신성하게 밝고, 무결점의 자연,
어떤 맑고, 변함없고, 그리고 보편적인 빛. . .

핵심적인 신고전주의 원리에 관한 포프의 정의는 그의 지리적 보편성을 시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위트에 관한 포프의 정의는 자연의 역사적 보편성을 시사하고 있다:

참된 위트는 옷을 입힌 자연이며,
종종 생각되기는 하였지만, 잘 표현된 적이 없는 그 무엇이다.

밀튼 이래로 가장 야심찬 우주론적 시인 인간에 관한 논고는 “우주와 관련한, 자연과 인간의 상태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시작하며, 그에 의해 보편적 상상력의 작품에서 종종 특징지어 졌던 소우주와 대우주의 소재를 소생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포프는 랄레프, 돈느 그리고 브로우니에게서 관찰된 작은 세계에 대해 점차적인 강조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고, 감히 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인간에 대한 적절한 탐구는 보편적 인간이다.

비평에 관한 논고가 보편적 비평원리를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면, 인간에 관한 논고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보편적 원리, 즉 의심의 여지 없이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일반적 본성을 파헤친 시인으로서 호머를 번역하고 세익스피어를 편집한 포프의 많은 노력으로부터 선정된 원리를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포프가 보편적 영감의 시인일 뿐만 아니라는 사실은 그의 작품 둔시아드(The Dunciad)에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마지막 문장인 “그리고 보편적 암흑은 모두를 매장한다”는 또다른 중요한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우주를 나타내는 또다른 단어인“모두”는, 소멸의 의미로서 “보편적 암흑”과 함께 사용될 때, 이 시인 자신의 죽음(내가 죽은 이후, 대홍수가 온다 Apres moi, le deluge)을 예언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경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은 단일한 결론으로 결합된다. 그렇다면 포프의 회복된 낙원(그의 인간에 관한 논고)은 그의 실낙원(둔시아드)을 앞서는 것으로 얘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마지막 문장은 아마도 필리스타인 성전의 무게에 짓눌려진 눈먼 삼손의 숙명을 반향하는 것으로 인용되었을 수도 있다.

19세기의 영국문학은 서정시, 영적인 자전, 개인적 수필, 소설과 같이 명백히 개인적 경험의 문학이다. 19세기 영국문학은 인간사를 개별화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념들 중 하나는 보편성이다. 쉘리는 그의 저서의 시의 옹호에서 전체적으로 영원한 신고전주의의 가치를 끌어들이고 있다. 쉘리는, 시를 “인간 본성의 영원한 형식에 의한 행위의 창조”라고 부르면서, 시를“그의 영원한 진리”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쉘리는 시란, “개별적이며, 또한 한정된 기간과 결코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들의 어떤 결합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와는 대조적으로, “보편적이며, 또한 내적으로 인간본성의 가능한 다양성 속에 있는 동기 혹은 행위 어떤 것이든 어떤 관계의 싹을 함유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보편성은 말하자면 전체론적이며, 영원하며 그리고 되풀이 된다. 보다 독창적이고 철학적인 정의를 위해서 우리는 콜러리지를주목해야 할 것이다. 콜러리지는 고전적인 혹은 신고전주의적인 술어들을 단계적 질서(개인, 특수, 일반, 보편)로 재구성하고는 독일 관념론자들의 방식으로 이를 종합한다. 앞서 언급했던 괴테류의 문학과 같이, 콜러리지는 상징에서 서로를 동질화하기 위한 적절한 도구를 발견한다. 콜러리지는 상징을 “상징이란 개별성 속의 특수성 혹은 특수성 속의 일반성 혹은 일반성 속의 보편성의 혼합체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라고 정의한다. 콜러리지의 일련의 관련된 용어들은 개별성에 의거하고 있는 일반성을 산출한다. 또한 보편성은 영원한 낭만주의적 필수품이 되어 왔음도 분명하다.

광활한 제국과 전례없는 대중적 관객을 갖게 된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이라는 용어는 보다 실제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 시기에 영국은 보편적 교육, (레일, 전보, 신문, 책발간에 의한) 보편적 전달방식을 완성하게 된다.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제국과 식민지를 통틀어서 최초로, 사람들은 영국문학을 위한 보편적 관객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 영어는 보편적 언어로 발전하게 된다 (다음 세기의 말경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의 영어사용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를 넘어서게 된다).

칼라일은 “우리는 세익스피어를 미래와 모든 시대의 진정한 보편시앙, ‘보편적 교회’의 탁월한 운치가 있는 신부로 부를 수 있지 않은가?”하고 묻는다. 칼라일의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상상력 속에 영국문학이 거의 종교적으로 제도화된 근대적 지위를 얻기 시작한다. 칼라일은 수사학적으로 인도제국과 세익스피어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우리에게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우리는 세익스피어 없이는 못산다! 인도제국은 어쨌든 어느날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으며 영원히 우리와 함게 존속할 것이다.”때로는 존슨과 마찬가지로, 칼라일은 바드의 문학을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여타의 주요한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가들도 동일한 어구를 사용해서는 이 시대의 팽창적 보편성을 굳건히 하고 고취한다. 러스킨은 고딕문화를 그의 보편성 때문에 찬양하고, 고딕문화의 불완전성을 옹호하며 “보편법칙”을 수립한다. 칼라일과 마찬가지로, 러스킨은 단순히 이 보편성이란 용어의 신고전주의적 수용을 확장한다. 마찬가지로 아놀드가 그리스와 히브류 문화 양자에서 어떤“보편적 질서 이후의 느낌”을 발견할 때에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아놀드가 프랑스대혁명에서 또한“보편적이며, 확실하며, 영원한 이념들의 질서”를 발견하였을 때, 아놀드는 새로운 지평의 모험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이들 이념들은, (그에 의하건데 “10진법으로 셈하는 것은 가장 쉬운셈법이라는”) 수학의 법칙과 같이, 어떤 문학적 규범의 단순한 전통을 넘어서는 진리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놀드는 이성의 원리,  새로운 정치적 질서에 의해 추진되는 “이성의 명령”은 “절대적이며, 영원하며, 보편적으로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상당한 정도로, 보편성은 이제 고대의 이념의 집합 보다는 오히려 근대적인 것과 함께 연상되게 되었다(물론 여러 이유가 -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더라도 - 이 고전적 세계에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놀드는 미래의 보편적 질서는 관념적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19세기의 마지막 1/4에 접어들었을즈음, 페이터(Pater)는 역사적 과거와 개인적 현재에 관한 자신의 세기적인 퓨전인 르네상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빈켈만의 말을 빌려서 자신의 그리고 당대의 문제를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다음과 같다: - 고대이상의 명료함고 보편성이 근대세계의 완전한 경험을 담을 수 있는 예술적 창조에 부응될 수 있을까?

이는 테니슨, 브로우닝, 아놀드 그리고 이러한 미학적 운동에서 보다 덜 두각을 나타낸 문필가들이 고민했던 문제이다. 브로우닝은 이 문제를 세익스피어적 독백의 특징들, 근대의 역사기술 그리고 당대의 새로운 형식의 소설인 드라마적 독백의 특징들을 결합함에 의해 해결한다.

가장 위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편화하기 위해 다른 방책을 추구한다. 이들은 종종 개인의 인생을 영원한 진리의 표상으로(sub specie aeternitatis) 확대할 정도의 강도로 다룬다. 디킨스는 핍(Pip)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과정에 대한 어떤 단서를 주고 있다:

그것은 기억할만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변화를 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인생이라도 마찬가지의 것이었다. 어떤 선택된 날이 그러한 날이었다고 상상해보고, 또한 그의 진로가 어떻게 달랐을 것인가 생각해보자. 읽기를 중단하고, 잠시 쇠 혹은 금, 가시 혹은 꽃의 기다란 체인에 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우리를 한 기억할 수 있는 날에 관한 첫 번째 연결의 형성을 위해서만 우리를 구속할 것이다.

동일한 예로, 이 소설가는 하비샴이 핍이 말하는“내게 내가 배웠던 것과 내가 무엇일 될가와 같은 질문들을 물었을”때와 같이 독자, 등장인물 그리고 작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가장 많이 부딪히는 이들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이 도식에서 드러나는 변화는 많다: “나는 불을 껏다, 그리고 침대로 기어갔다,”라고 핍은 런던에서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불편한 침대였으며, 나는 더 이상 그 침대에서 과거의 꿀과같은 잠을 자지 못했다. 아담의 사탄과의 조우에 관한 밀튼의 신비적 설명에서 그 모델을 설정한 디킨스는 한 독자를 불을 끄고 뱀처럼 침대로 기어가는, 그리고 여기에서 천진난만한 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편한 경험에 헤메이게 되는 핍의 이야기에 가깝게 암시하고 있다.

일반화의 전략을 채택한 테니슨은 사후의 비판적 주해에서, 비슷하게 인메모리암(In Memoriam)을 보편화한다. 테니슨은 시에 대해

' 나‘ 는 자신에 관해 말하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말하는 인류의 목소리이다“라고 말한다. 시 그 자체에 있어서, 테니슨은 우리의 현실적 취미로는 조금은 너무 거창하게 일반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보편화의 원리는 이 작품에 깃들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작품의 전 세계적 인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테니슨 이상으로 예술에 관한 미학적 운동의 초점은 인간에 대한 낭만주의적 보편화로 확장되며, 여기에서 인간은 과학, 종교 그리고 철학과 같은 과목에 동등한 어떤 형식적 활동의 영역에서 정의된다. 동시에, 필자가 이 책의 마지막 논문에서 다루게 될 경험에 관한 낭만주의적 개별화는 소위 영국의 보편주의자들에게 어떤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들 보편주의자들의 어려움의 부분적 이유는 아일랜드와 미국 문학 시대의 도래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영어로 쓴 최고의, 혹은 최소한 가장 보편적인 20세기 작가는 영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츠, 조이스 그리고 베케트는 아일랜드인들이지만 이들은 또한 지리적 비고정성에 의해 그리고 또한 어떤 의식적인 언어적 고안에 의해 국제적이 된다. 이츠는 영국시의 이국적 전통에 해박하였으며, 베케트는 영어와 불어를 교대로 사용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이스는 스스로 어떤 의문스런 국제적 언어를 창조하였다. 미국인으로 제임스, 파운드 그리고 엘리엇은 마찬가지로 지리적으로 비고정적이다. 물론 이들 중 둘은 이츠와 함께 다소 성공적으로 영국적 전통의 외관을 취하고 있다. 아일랜드와 미국작가에 대항한 토박이 영국작가들을 찾고자 할 때는, 하디, 로렌스 그리고 오덴과 같은 작가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는 상당한 인물들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보편주의자의 역할로는 이중 아무도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디와 로렌스는 소위 고유한 장소를 갖는 것으로 얘기되는 어떤 도전적인 지역주의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의 보편성을 표현한다 - 물론 로렌스의 경우는 장소가 변하기도 한다. 제임스와 엘리엇의 영국 이민을 보완하기라도 하듯이, 오덴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이들 세사람 모두는 코스모폴리턴이지만, 미국인들의 작품은 오덴의 작품 보다 더 큰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다. 마치 그러한 점에서 하디와 로렌스의 작품이 그렇듯이 말이다. 또다른 범주에서, 폴란드 태생이지만 성인이 되어서 터득한 언어로 작품을 쓴 조셉 콘라드는 완벽하며 엄밀히 말해서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코스모폴리턴적 시각을 드러낸다. 아마도 조셉 콘라드는 비모국어 사용자가 영국문학의 전통에 뛰어들어서 이를 일신한 주요 인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