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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와 서양의 서사시
아마도 우리는 [알레고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시를 본질적으로 매체로서보다는 목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적 수사학의 목적은 한 개인의 내부의 특수한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이러한 경험을 촉진시킨다. 본질적으로는 개별적인, 로고스 프로포리코스 (logos prophorikos : 구어)는 관객이 스스로 시를 완성하는 것을 요구하며, 이 과정에서 관객은 시인의 사유방식(thought-modes)에 진입하게 된다. 관객은 시인의 언어적 장막을 통해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며,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 경우의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의 관념과는 다른 진리이다. 관객은 사실 혹은 개념이 아니라 그에게 자신의 신성을 현시하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맑게 개인 밤하늘의 섬광을 바라볼 때와 같이, 관객은 자신이 단지 인간이란 존재에 의해 그 자신의 세계를 초월하게 되고, 그가 더욱 신화적으로 생각할수록, 우연성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문득 자각하게 된다.
설득력 있는 알레고리는 중복되지 않는다 그러한 알레고리는 상상력과 사고의 대체작용(counterplay)을 자유롭게 한다. 그에 의해 상상력과 사고는 서로 자극제가 되며, 양자는 빈번한 접촉을 통해 성장할 수도 있다.
알레고리아(Allegoria)는 메타퍼를 사용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메타퍼이다. 알레고리아는 계속성있는 메타퍼로 정의되며, 메타퍼에서 발견되는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통상적 관계를 보여준다. 알레고리아는 이를 더 깊은 의미를 지닌 일련의 개별체들 형태 속에서 현시된다. 감각적 디테일의 각각의 그러한 구체적인 것은 그의 애초의 기반에 의해 이미 메타퍼가 된다.
주의 깊은 독자는 간파하였을 것이다. 알레고리와 메타퍼, 사고와 상상력에 더하여서, 우리의 주제들은 또한 신화, 신성(divinity), 진리, 그리고 경험, 그리고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개별성과 그리고 함축적 의미의 보편성과 같은 용어들을 소개하여 왔다. 본 제목과 함께, 우리의 주제들은 시인, 시, 관객,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서사시 독자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일정한 질문들을 제기하여 왔다. 처음부터 이들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 좋은 것처럼 여겨져 왔다. 우리는 때에 따라서는 보다 많은 고찰을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 회귀하여야 할 것이지만, 본고에서의 어떤 용어도 최종적 정의가 내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과제인, 알레고리적 요소가 우리의 주제인 서양서사시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의 논제, 즉, 처음부터 끝까지 서구 서사시는 알레고리적이다라는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견해는 신고전주의만큼이나 새로울 것이 없다. 르 보슈(Le Bossu)는 1675년 그의 저서인 서사시 논고(Traite du poeme epique)에서 서사시적 활동에 관해 그것은 보편적이며, 그것은 모방된 것이며, 그것은 [상상력]으로 치장되고, 또한 그것은 알레고리적으로 도덕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르 보슈는 계속해서 이러한 진리는 저자에 의해 발명되어 졌지만..어떤 역사와 신화로부터 포착되는 것으로 보이는 활동 이면에 가려진다고 말한다. 신화는 물론 도덕을 갖는 상상적인 이야기이다. 르 보슈에게 있어서 도덕과 알레고리는 실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모든 서사시는 어떤 도덕을 갖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들 서사시들은 모두 알레고리적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인 알레고리는 특별한 수사학적 장치, 즉 지속성있는 메타퍼(퀸틸리언, Quintillian), 단어의 의미가 전적으로 변경되는 일련의 메타퍼(키케로), 형식에 관한 일반적인 근대의 개념에서와 같은 상당한 수준의 추상화를 요구한다는 명제들과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문제의 본질은 우리는 알레고리의 이해에 어떤 진전을 이루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제 알레고리를 형식(form)으로서 보다는 방식(mode)으로, 어떤 동종의 표현으로서가 아닌, 여러 술어들의 불안정한 카운터플레이(에드가 윈드, Edgar Wind)로서, 중세와 르네상스 이론에서 통상적으로 말해지는 네가지 의미(quatre-sens)가 아닌, 도식화하기 어려운 담론으로 인식하게 된다. 욘 휘트만은 알레고리가 의미의 여러 대응 단계들 사이의 다양성을 이용하면 할수록, 대응은 더욱 더 비판에 견디기 어려워진다고 보았다. 그 대신에, 그 차이는 알레고리가 계급을 폐쇄하고 대응을 강조하면 할수록, 보다 덜 편향적이며, 따라서 보다 덜 알레고리적이 된다. 알레고리는 문학 그 자체처럼 여겨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성서 해석학자는 근대의 비평가처럼 여겨지기 시작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명제에 어떤 사람은 동의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이 알레고리라면, 어떤 것도 알레고리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의 주제는 문학이 아니라 서양 서사시임을 상기하자. 이러한 전통에서 무엇이 알레고리적이며, 무엇이 알레고리적이 아닌가? 혹은 문제를 돌려서, 이 전통 내에서 누가 자신을 알레고리적으로 간주할 것이고, 누가 그렇게 간주하지 않을 것인가? 단테는 자신을 알레고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바이런은 어떤가? 호머는 어떤가? 둘 다 이 논제에 관해 단언한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돌려 보자. 다른 관점에서 단테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전기 이전의 관점에서 단테는 신화적인 사람이 아니다. 근대적 관점에서 볼 때, 단테는 역사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오이에르바흐는 단테를 고대 그리스가 매우 다르게 구성하고 중세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을 구성한 것을 구성한 최초의 사람으로 기술한다. 즉 오이에르바흐는 단테를 멀리있는 전설적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의 역사적 현실에서 알고 있는 바의 인간, 즉 그의 통일성과 전체 내에서의 구체적 개인으로 기술한다. 오이에르바흐의 기독교적 믿음과 관련해서 볼 때, 이는 또한 신화적이 아닌가? 그레고리 나기는 신화는 집단적 표현, 즉 사회 그 자체가 참이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표현을 나타낸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나기는 신화가 대상으로 삼는 어떤 사회의 기준에서, 신화는 일차적 현실이다라고 말한다. 나기는 호머의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또한 단테의 사회를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단테는 신화적이며, 역사적이며 그리고 알레고리적이다. 더욱이, 단테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단테는 또한 경험적이라고 불리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화, 역사, 알레고리 그리고 경험을 분리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며, 결코 동일한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서사시적 표현에 있어서 이들 요인들은 결합한다. 호머와 버질, 단체와 아리오스토, 스펜서와 밀튼, 이 모두는 신화적 작가들이지만, 이들 모두는 역사적 주제를 갖고 있다. 이들 모두는 경험을 표현하고 있지만, 또한 이들 모두는 알레고리적이다. 이러한 포괄성은 서사시를 다른 문학양식과 구분되게 하는 하나의 특징이다. 더욱이, 우리는 모든 주요 서사시는 신성하고, 우주론적이며, 지리적이며 또한 철학적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정도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위 장르들을 생성하고 보다 큰 양식을 통합적 정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정도의 다양성이다. 우리는 서사시의 이 모든 국면들을 탐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가지 즉 알레고리적인 것에만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요소들과 관련하여 이 요소를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서양의 서사시는 범위가 넓은 주제이다. 본고는 고전기 이전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 고대 로마, 중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17세기 스페인, 그리고 16, 17 세기 그리고 19세기 영국에서의 예들들 살펴보는 것으로 국한하고자 한다.
1.
호머에 관해 논의해보자. 고전학자, 아테네의 철학자, 로마의 비평가, 신플라톤주의자,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의 해석가들에게 있어서 알레고리와 관련해서 호머는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한다. 호머의 텍스트 그 자체는 알레고리인가? 호머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의 형태로 접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은 호머를 본질적으로 자연주의적이며, 약간은 알레고리적이고 어떤 비현실적 요소(한 개의 눈을 가진 괴물, 말하는 말)를 등장시키는 탁월한 영감을 갖춘 소설가로 쉽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은 거대한 알레고리의 전통에 대개 무관심하거나 호머 스스로 알레고리를 중시하였다는 견해에 본능적으로 동의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라블레(Rabelais)에 의하면, 마치 오비디우스(Ovid)가 그의 변신(Metamorphoses)에서 복음서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호머 역시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네카 역시 철학적 성경연구가 특유의 보다 균형 있는 시각에서, 이러한 주장들 중 어떤 것도 호머에게는 타당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이들 주장들이 모두 호머의 작품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 모두가 서로 모순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호머의 작품에는 무엇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러한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호머를 알레고리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독자들은 글도 읽을 줄 모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같은 입장에 서있을 것이다. 이들 독자들은 청중에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설득시켜야만 했다. 더욱이 그들은 전거(authority)에 의거함이 없이 최선을 다하여 왔다. 시 뿐만 아니라 비평적 글들은 호머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신화적 형태, 역사적 의미, 알레고리적 의미 그리고 테마적 내용 사이의 명확한 선을 긋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어떤 사람에게 신화적인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역사적인 것일 수도 있다(트로이의 멸망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위를 예고하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는 알레고리적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단지 테마적인 것처럼 보여 질 수도 있다. 또한 어떤 독자는 오딧세이는 알레고리적이지만, 일리어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머의 의도와 관련해서, 그 독자는 그와 같은 서사시 전통의 후기에, 그와 같은 완전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시인이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의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호머는 그의 작품에서 후세가 이해하기 힘든 알레고리적 해석을 명료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명목적 사건들의 발생시기와 호머의 그에 대한 편집 사이에서 이 전설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겨놓은 3가지 중요한 술어 즉 mythos(신화), plasma(허구), 그리고 istoria(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모두는 현실 혹은 현재의 경험에 대비된다. 호머는 신화적인가? 나기(Nagy)에 의하면, 그리스 서사시의 일차적 담론은 트로이 전쟁인데, 이는 칭찬과 책망의 균형이라는 인도-유럽적 사회 원리에 따른 자기 동기적인 것이라고 한다. 나기는 그 예를 아프로디테의 찬양과 아울러 헤라신과 아테나신의 비난을 수반했던 파리스(Paris)의 판단 속에서 발견한다. 나기는 더 나아가서 신화가 살아있는 전통으로서 존재하는 사회에서, 신화란 허구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호머의 손에서 그것은 허구가 된다. 이는 또한 알레고리가 아닌가? 물론 그럴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사실인가? 그것은 최소한 호머가 물려받았던 전설이자 구전 서사시의 일부이다. 따라서 그 판단은 어느 정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카테고리 모두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호머는 신화적이다. 그런데 호머는 또한 종교적인가? 헤라,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서사시에서 잠재적 규범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중심권력으로도 등장한다. 제노페이니스에 의하면, 제우스는 일신론적 신과 유사하다. 제우스는 동일한 장소에 머물고 있지만...., 힘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한다. 노시카에서, 오딧세우스는 제우스의 딸인 아르테미스를 보게 된다. 파트로클로스는 헥터에게 말하기를,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것은 헥터 당신이 아니라 아폴로였다고 했다. 오비디우스에서, 넵튠은 아폴로에게 아킬레스를 살해하라고 꼬득였다.
만일 호머가 종교적이라면, 일리어드는 신성한 것인가? 타소나 밀튼의 기준에 의하면 그렇다. 분명 아킬레스의 방패는 그것을 예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킬레스는 또한 알레고리가 아닌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모든 책을 피곤할 정도로 조사하지 않고, 일부 요점만을 접근하도록 해보자. 단테나 밀튼의 신학적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호머는 여하 간에 때때로 기독교적 논쟁을 시사하는 방식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 모든 고난은 무엇 때문에 겪게 되는가? 제3장을 살펴보자. 어떤 의미에서, 헬렌의 강간은 원죄의 또 다른 버전일 수도 있으며, 악마적인 파리스, 애처가인 메네라오스, 자만심과 후회의 과정을 겪는 헬렌은 이브의 경우와 유사하다. 헬렌의 미모, 파리스의 매력 등 이들 신들의 능력은 일종의 운명이며,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들의 의지는 실질적이며 도덕적인 사항들과는 다를 수도 있다. 성실한 남편과 방탕한 왕자의 알레고리로서 메네라오스와 파리스는 결투를 하기로 약속하였지만 어찌됐든 그들 자신의 문제보다 더 큰 갈등을 해결하는 데는 무력하다. 왜냐하면 헬렌(열정)이 그 해결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머는 헬렌을 여신과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헬렌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우스의 역할이다. 하지만 제우스의 역할보다 더 거대한 것은 운명(Fate)의 역할이다. 파리스와 메넬라오스는 싸우기 보다는 그들의 알레고리적 성격을 보여준다. 스펜서의 경우와 같이, 호머의 알레고리는 복잡하고, 심리적이며, 도덕적이고 신학적이다.
제4장은 신들의 위원회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고대 인간사회의 위원회와 알레고리적으로 평행선상에 있다. 제5장에서,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폴로 그리고 아레스신은 전쟁에 개입한다. 이야기의 중간쯤에, 디오메데스는 아프로디테를 공격한다. 어머니에 의해 버려진 아이네아스는 아폴로에 의해 구원되고, 아폴로는 아이네아스를 화려한 이미지로 가꾼다. 버질은 문명의 사도로서 트로이의 왕자라는 이 상징을 얼마나 주의 깊게 탐구하였는가. 현저하게 자연주의적인 제1장, 제4장, 제16장 그리고 제24장과 마찬가지로, 제6장은 고대의 신학적 담론을 경험적 차원으로 전개하며, 여기에서 디오메데스는 글로코스에게 왜 인간들은 전쟁을 하는가를 질문한다. 제7장은 제우스의 황금줄과 황금저울의 알레고리적 에피소드로 전개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신들이 다시금 개입된다. 에너지(아폴로), 문화(아르테미스), 전쟁(아레스), 지혜 (헤르메스), 풍요 (제라), 권력 (제우스), 사랑(아프로디테), 시간(크로노스)이 상징하는 것들을 살펴보자. 이러한 것들이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이며, 우주적 양상의 비가시적 세계의 알레고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14장과 제15장은 더 많은 알레고리적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헤라에 의해 교사되고, 슬립과 아프로디테에 의해 차례로 유혹된 제우스의 짝짓기, 헤라의 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 등이 그것이다. 제18장의 결론은 일리어드에서 가장 광범위한 알레고리적 에피소드로 가득찬 소우주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 하늘, 바다, 태양, 달 그리고 별, 대양 등 모든 것은 하나의 작품에 포함되고 있는데, 너무나 거대하고 문맥상으로 일치하지 않아서, 오비드의 율리시스에서 왜 테티스가 천상의 자질을 가진 그녀의 아들과 같이 거칠고 어리석은 병사를 무장하도록 고심하였을까하는 이유를 아작스에게 묻게 된다. 그러므로, 에피소드의 관련성과 부조화의 알레고리 원리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일리어드가 종지부로 감에 따라, 알레고리적 요소는 많아진다. 제21장은 일련의 다차원적 패로디, 인간과 같은 갈등을 겪는 상징적 신들과 아울러 물의 신 대 불의 신의 근원적 투쟁을 다루고 있다. 아테나 대 아레스, 아폴로 대 포세이돈, 헤르메스 대 레도, 헤라 대 아테미스, 헤파이스토스 대 산토스의 투쟁은, 한 단계 아래에서 반은 신인 아킬레스와 언젠가는 죽을 운명의 헥토의 결정적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고 하겠다. 제우스나 아프로디테와 같은 신비적인 등장인물들만이 싸움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몇 안 되는 상대방의 설명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제23장에서, 체육대회는 이 서사시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전쟁에서 어떤 평화적 은유로서 느껴지게 한다. 제24장은 전형적 모습(신들의 방문, 간청, 장례식)과 아울러, 화해의 시나리오에 헤르메스를 포함시키고 있다. 호머가 이 분노의 서사시를 결론지으면서(여기에서 또 다른 알레고리적 등장인물로는 두려움과 공포, 증오, 혼돈 그리고 죽음, 아테 혹은 블라인드의 어리석음을 포함한다), 호머는 지혜의 신으로서의 헤르메스를 보다 난해한 오딧세이에의 징검다리로 간주하였는가? 의심할 여지없지 그런 것 같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이 서사시의 마지막에 등장하였듯이, 이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오딧세우스의 재등장이 예언되고 있다.
서사시의 오랜 역사에서 일리어드와 오딧세이 이 두개의 작품만이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영웅적 정신은 영웅적 신체를 보완하고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페네로프(신념)는 헬렌(무신념)을 보완한다. 이 두 작품을 보완하고 구분하게 하는 단순한 양상적 대립(비극 대 희극,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박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일리어드와 복합적이고 윤리적인 오딧세이의 대립)과는 달리, 호머의 알레고리 결합은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리어드와 마찬가지로, 오딧세이 역시, 헤라와 아프로디테에 대한 아테나의 우월성이 시사하듯이, 신학적이다.
역사를 통해, 오딧세이는 일리어드 보다 훨씬 더 알레고리적이었으며, 그 이유는 쉽게 발견된다. 오딧세우스의 이야기(제9장-제12장)에서 오딧세우스 자신이 명백한 알레고리스트이며, 호머는 매우 섬세하게 오딧세이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호머 그 자신이 알레고리를 사용하고자 하며, 따라서 예컨대 조잡하고 덜 세련된 재료를 재작업하여 세련시키고 알레고리화 한다. 오딧세이는 일리어드에서 여러 요소들을 공연하게 관련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퇴각과 재진입이라는 고대 서사시 주제의 알레고리로 간주될 수 있기도 하다.
가족, 우정, 그리고 지도자의 원칙에 묶여있기도 했지만, 오딧세이는 혼자만의 생각(또는 보다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영혼)에 관심을 집중한다. 외동아들인 라에르테스는 우리들의 영웅인 외동아들의 아버지이며, 우리들의 영웅은 또다른 외동아들인 텔레마코스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 자체는 호머의 알레고리적 영웅이다. 파리스에 필적하는, 그의 유혹은 영웅적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키르케의 지팡이, 사이렌스의 노래, 헬리오스의 암소 등의 알레고리가 이를 말해준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원죄의 비유이자, 이 서사시의 출발점에서 예고된 유혹이자, 이 지도자 자신이 아닌 그의 친구들이 희생되게 되는 유혹이다. 마찬가지로 페네로프는 유혹에 저항하지만, 그녀의 하녀들은 저항하지 못한다. 페네로프는 칼립소, 키르케 그리고 노시카를 포함한 알레고리적 여성 등장인물 4인방 중 한사람이다. 유사한 형태로, 오딧세우스는 아가멤논, 메네라오스 그리고 아작스를 포함한 또다른 알레고리의 4인방 사이에 끼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대칭은 자연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텔레마키아드에 있어서의 알레고리적 요소들은 쉽게 간과되어져 버린다. 메네라오스가 프로테우스의 텔레마코스에게 말할 때, 헤라클리투스는 이 인물에게서 우주의 기원을 깨닫게 된다(그리고 우리는 오딧세이의 우주론적 차원을 깨닫게 된다). 베이컨에게 있어서, 프로테우스는 생산적 물질을 표상하지만, 통상적인 고전적 관점에서는 진리(Truth)를 표상한다. 호머가 그와 같은 알레고리적 의미를 알지 못했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제5장에서, 아리오스토의 기사들 중 한 사람같이, 오딧세우스는 헤르메스, 포세이든, 류코시아 그리고 아테나와의 일련의 보다 공개적인 알레고리적 조우를 위해 칼립소 섬으로부터 출발한다. 제6장에서, 오딧세우스는 어떤 설명에 따라 노시카를 응시한다. 전반적으로 파이아키아의 에피소드는 어떤 알레고리적 표현, 어떤 애매모호한 패러다이스를 표상하는데, 이는 이후의 전통에서 많이 모방되었다. 거기에서 (이 서사시의 또다른 음유시인인 피미어스의 이름이 시사하듯이, 단지 유명한 것에 대비되는 것으로, 인기있는) 데모도코스는 호머 작품에서 알레고리적 형태로 아킬레스와 오딧세우스 사이의 논쟁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통에 있어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그의 의미에 있어서 다층적인) 게임의 막간 이후에,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노래가 수반된다. 이는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우주론적으로 해석된 또 다른 알레고리의 삽입이며, 분명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의 테마를 위한 또 다른 은유이다.
오딧세우스 그 자신은 사이클롭스 (동그란 눈), 심플리게이즈 (덜그덕거리는 바위) 그리고 네모(무명인)와 같은 알레고리적 주제에 관해 노래한다. 근대의 독자들은 이 서사시의 후반부를 본질적으로 자연주의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마술 보트 여행에 의해 도입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여기에서 헤라는 지혜의 여신과 조우하고, 헤라는 그를 그의 영토에서 거지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로망스의 소재들은 쉽게 알레고리화 할 수 있다. 예를들면, (지상에서) 유마이오스와 페네로프와 오딧세우스의 해후, (네키아의 후반부에 나오는 지하에서) 아킬레스와 아가멤논과 오딧세우스의 해후가 그렇다. 또한 악에 대한 선의 승리도 그러한 예의 하나인데, 이는 반대기질(안티오스), 불성실(암피머스) 그리고 배반의 세력에 대항한 지성, 신념 그리고 충성이라는 알레고리의 확장을 완결시키고 있다.
2
신계보학에서와 같이, 고전서사시가 알레고리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할 때, 우리는 논란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 한가지의 의문은 적어도 어디에서 헤시오드의 알레고리가 끝나는가이다. 왜냐하면, 진공, 암흑 그리고 빛과 같은 우주론적 요소, 법, 지혜 그리고 평화와 같은 추상적 원리들, 잠, 죽음 그리고 늙는 것과 같은 신체적 상태, 복수와 투쟁과 같은 도덕적 작용에 더하여서, 헤시오드는 주된 신성과 종속적 신성 양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뮤즈 신, 기가스 신, 님프 신, 그리고 운명의 신을 포함하고 있다. 결론에서, 헤시오드는 제이슨, 오딧시우스, 안키세스, 아이네아스의 방향에서 이 모두를 지적하고 있다. 헤시오드에게 있어서 이들 영웅들이 그의 나머지 등장인물들 보다 덜 알레고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신계보학은 진실로 서사시인가? 알레고리적 전통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은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의 우리 조차도 이 질문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레고리적 표현으로부터 자연주의적 나레이티브로 서사시 장르의 정의를 얼마나 멀리 이동하여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3
서사시를 미세화하고, 풍자화하고 그리고 근대화하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반적 노력은 호머적 알레고리의 형태를 대표한다. 콜리마쿠스(Callimachus)는 어떤 책에서 고전기 이전의 서사시가 행했던 바를 수백개의 문장에서 행한다. 테오크리투스는 폴리피무스를 조롱한다. 일종의 심리학적 알레고리를 통해, 아폴로니우스는 호머 이전의 제이슨을 근대 도시적 정신으로 재가공한다. 지면 관계상, 우리는 아르고노티카 만을 다룰 것이며, 그의 제3장의 서론 만을 다룰 것이다. (서사시라기 보다는 사랑의 시로 간주되는) 칼리오페 보다는 오히려 에라토의 명상 하에서, 아폴로니우스는 헤라를 갖게 되며, 아테나는 아프로디테에게 제이슨과 메디아가 사랑에 빠지도록 하게끔 간청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파리스의 판단과 같은 유형의 모방은 어떤 알레고리 위에 또다른 알레고리를 형성하게 한다. 힘의 신과 지혜의 신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미와 사랑(에로스)의 신의 도움을 간청하기 이전에 먼저 둘이 화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이며 여기에서 분쟁의 여신(에리스)는 협력의 우두머리 신으로 대체된다.
아폴로니우스 해석판 역시 역시 간음에 반대되는 부부애의 이야기이다. 이 해석판은 오디시우스의 주제들(여기에서 오딧시우스와 충성스런 페네로프 뿐만 아니라, 메넬라우스와 부정직한 헬렌이 결합한다)을 병합하고 이들 주제들을 일리아드를 연상케하는 주제(여기에서 파리스와 헬렌, 아가멤논 그리고 브리사이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는 많은 다른 등장인물들이 간음을 범하게 된다)와 대비시킨다. 아폴로니우스는 또한 다른 전통적인 요소들을 결합한다. 왜냐하면, 메디아의 가족 내부에서의 사악한 배반은 클라이템네스트라의 살인마 같은 행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를 결혼이라는 조화로운 묘사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에 관한 그의 노래에 나오는 데모도코스의 모델을 대체하고 있다. 이 알렉산드리아인은 헤파이스토스에 관해서 헤파이스토스는 일찍이 한 부유하는 섬 위의 넓은 동굴 안의 용광로의 모루로 가서는, 섬광을 내면서 모든 방식의 신기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문장에서, 아폴로니우스의 관객들은 불, 물 그리고 흙의 알레고리, 육지, 섬 그리고 동굴의 형상,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비유적 표현들을 접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중 불, 물, 그리고 흙이라는 첫번째 3개의 용어들은 영원한 기본적 드라마에 속할 것이고, 육지, 섬 그리고 동굴이라는 후자의 3개는 영원한 그리스의 지리학에 속할 것이다. 서사시의 소분류된 특징 중 하나는 지리적이라는 것이다. 일리어드에서, 우리는 트로이에 우리 자신을 이동하고 있고, 오딧시우스에서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로 되돌아 오고 있음으로 해서 광범위한 여행을 하는데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아르고노티카에서, 우리는 훨씬 더 멀리 여행하고 있지만, 늘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을 떼지 않고 있다.
4
우리가 알레고리를 좀더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근대에 이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한 오해들 중에는 하나의 작품은 작품으로서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명시적으로 알레고리적이어야만 하고, 그러한 작품에서 알레고리적 요소들은 정합적이어야만 하며, 알레고리는 알레고리적 이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들을 들 수 있다. 버질은 그러한 잘못된 관념을 표출한 주범인 것 같다. 왜냐하면, 아에네이드에서 난해한 알레고리적 이해는 버질 자신에게서나 그의 비평가의 편에서나 제도적인 것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르비우스(Servius)는 버질의 작품을 규정하기 위해 '다중의미적인'(polysemous)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불멸의 계획을 착수하는데, 그는 (아에네이드 1장에서 4장까지에서 젊음으로부터 노쇠될 때까지의 생의 과정을 구분했던) 초기 기독교의 풀젠티우스, (허구의 장막 속의 진실이란 시를 쓴) 중세의 버나드 실베스트리스, (스승을 인간지혜의 정점 밑에서 다루었던) 단체, 그리고 (이 작품에서 최고의 선에 대한 질문을 보았던) 란디노를 포괄하고 있다. 이들과 유사하게 보이아르도(Boiardo)에서 밀튼에 이르기까지의 시인들은 자신들의 아에네이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독자들이 버질에서 무었을 발견하였는가가 아니라, 이 작품에서 어떤 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게 하였는가에 있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아에네이드는 그보다 앞서의 알레고리의 종합으로부터 설정된 알레고리이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버질에게는 순박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호머의 영향은 이 알렉산드리아인, 이 아테네인 그리고 이 로마인만큼이었으며, 그의 알레고리는 신화적, 역사적, 신학적 그리고 경험적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특히 르네상스와 르네상스 이후의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복합적인 역사의식에 관한 최초의 서사시로서 아에네이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알레고리이다. 로마에 관한 표현에 있어서도 버질은 알레고리스트이다. 그의 알레고리는 정치적이며, 종교적이며 그리고 호색적이다. 물론 버질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버질의 시에서 우리가 보는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버질에 대한 2세기 이상의 연구에서 우리는 버질이 말했던 암시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호머에 관한 버질의 알레고리는 보다 더 직접적인 주제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현재 기본적 분석을 하고 있지만 충분한 해석이 되어 있지는 못한 상태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아에네이드의 첫 반절이 오딧세이를 모방하고 있고, 두번 째 반절은 일리아드를 모방하고 있다는 관점을 포기하기를 주저하여 왔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관념이었는데, 또다른 동시대의 비판적 견해였던 버질의 시의 두 부분을 두개의 다른 주제, 즉 via contemplativa와 via activa를 할당했던 이론 만큼이나 부정확하다. 아에네아스가 아킬레스의 투지(그의 무모함은 제거된다)와 오딧시우스의 신중함(그의 교활함은 사이논으로 전이된다)을 표현하고 있다는 스칼리게로의 견해에서와 같이, 그 이전의 성격규정의 엉성함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에네이드 전체를 논의할 수는 없지만, 그의 중심적 이야기, 디도와 아에네아스의 이야기를 주목함에 의해, 아에네아드의 주요 구조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머, 아포로니우스 그리고 다른 전통적 거장과 마찬가지로, 버질이 그의 영웅과 여걸의 외출에 관해 그날은 최초의 죽음의 이유이자 최초의 슬픔이었다라고 말할 때, 그는 그의 주제가 인간의 몰락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폴로니우스의 헤라와 아프로디테와 마찬가지로, 버질의 주노와 비너스는 비극을 공모하였는데, 그것은 조브의 간청을 받은 머큐리의 방문이 촉발시켰던 비극이었다. 아에네아스 그 자신은 머큐리의 출발을 아폴로와 운명의 신의 탓으로 돌린다. 여기에서 알레고리는 신학적이며 도더적이다. 밀튼과 마찬가지로, 버질은 그의 여걸의 악한 행동에 벌을 가한다. 하지만 밀튼과는 달리, 버질은 우리가 그의 결과를 추측하도록 하고 있다(그녀의 자살은 그녀의 종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여러 등장인물들로 혼재되었지만(그녀는 호머의 페넬로프, 헬렌, 노시카, 칼립소 그리고 키르케를 연상케하며 또한 아작스처럼 자살을 시도한다; 그녀는 유리피데스와 아폴로니우스의 메데이아를 모델로하고 있다; 그녀는 카르타고의 역사적 설립자이자 그녀의 새로운 계승자인 클레오파트라를 모방하고 있다), 디도는 어쨌든 아에네아스 만큼이나 독창적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문학적인 것을 역사적 전거(호머의 오딧시우스, 헥터, 아킬레스, 아가멤논 그리고 파리스; 제이슨의 초기 묘사; 안토니와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와 결합하고 있지만, 그는 디도를 이천년 동안 이 부부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찬란한 다면가치 속에, 그리고 거의 수백개의 오페라적 표현에 디도를 끌어들이고 있다. 더욱이, 이 부부는(이들이 이 동굴에서 결혼한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로마의 법은 의식을 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튼의 아담과 이브를 받쳐주고 있으며 스펜스의 브리토마트를 붕괴시키고 있다. 중요한 시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들의 카리스마를 벗아나지 못했다.
스펜서와 밀튼의 시각을 통해 그들을 재검토함에 의해, 우리는 그들의 성격에 관한 어떤 통찰을 하게 된다. 디도와 아에네아스와 마찬가지로, 브리토마트는 정숙과 음탕의 두가지 기질을 갖고 있다. 브리토마트와 마찬가지로, 아에네아스와 디도는 동일하다. 이들의 언행을 읽을 때, 우리는 자신과 영혼에 관한 알레고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있어서, 버질 자신의 개성에 관한 두가지 측면을 듣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디도와 아에네아스는 여러 제국을 설립한 정치적 지도자들이며, 그들의 맹세를 저버린 추방자들이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헤이드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는 제6장에서의 이러한 조우로부터 그리고 물로 제4장에서의 그녀의 비극으로부터 디도를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녀가 제1장에서 3장까지에서도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제7장에서 12장까지에서 암시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중심인물을 가진 서사시의 가능성은 밀튼에게는 잃을 수 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생존시 디도는 크뢰사와 대비되는 사람이며, 죽어서는 라비니아의 대비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자신이 가한 상처로부터 아에네아스의 검에 죽게되고, 그녀의 화장용 장작더미는 헥터의 그것을 상기시킨다. 아에네아스는 헥터의 소생이며, 그의 아킬레스 검은 또다른 헥터 혹은 디도로서투르누스의 죽음의 동인이다. 버질에 있어서는 어떤 것도 단순하지가 않다.
아에네아스의 지옥으로의 좌천은 오딧세이에서의 두개의 지옥으로의 좌천에 대한 반작용적 유형이다. 호머는 그의 두번째 작품과 함께 그의 첫번째 작품을 수사하였다. 이제 버질은 호머의 두작품을 수사하고 있다. 마치 방식에 있어서 지나치게 알레고리적이고자 하는 것처럼, 이 로마의 시인은 우리들로 하여금 혼돈, 화염의 연속, 고통과 치료, 병마와 연로, 불안, 굶주림과 곤궁에 직면하도록 하고 있다. 죽음과 고통은 호머의 죽음의 신 자신의 형제인, 잠의 신, 죽음을 부르는 전쟁의 신 그리고 (파리스의 재판을 도발하였던 에리스와 같은) 불화의 신에 의해 수반되고 있다. 아에네아스와 함께 우리는 과거의 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 과거의 스킬라, 브리아레우스 그리고 레나엔 하이드라, 과거의 키메라, 고르곤, 하피 그리고 게리온을 계속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단지 개막 모습일 뿐이다. 황천의 지배자인 하데스에 관한 버질의 완벽한 지리학은 단테의 지옥편에 충분히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버질 그 자신이 제6편 말미에서 분명히 서술하고 있듯이, 아에네아스의 혈통은 실제가 아닌 거짓공상이다. 그것은 사실상 개인적이고 심리학적이지만, 또한 우주론적이며, 역사적이며 그리고 예언적인 공상적 알레고리이다. 우주론, 역사 그리고 예언도 역시 가공적인 것인가? 예언은 버질의 기독교적 후계자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단테는 버질의 역사와 우주론을 전용하게 된다. 세네카가 호머에 관해 언급하였듯이, 모든 교리(이 경우 신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교리)가 호머에게 존재하며, 그 모두는 서로가 모순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버질은 그의 스승을 진지하게 고려하였던 것이다.
버질의 알레고리에 대한 간략한 고찰에 있어서, 우리는 최소한 제8장 아킬레스의 방패에 관한 버질의 알레고리를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아에네아스의 방패는 비너스의 요청으로 벌칸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버질이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 류의 화해에 관한 아폴로니우스의 설명을 확장하는 방식을 무심코 주목하게 된다.) 그리스적 방패와 마찬가지로, 이 로마인은 소우주를 대우주 내에 두게 되며, 이는 야심적인 알레고리의 통상적인 장치이다. 란디노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응론에 의거해서 아에네이드를 알레고리화 하였다. 이제 우리는 란디노가 어디에서 이를 발견하였는가를 알게 된다. 버질의 아에네아스 방패는 호머에 있어서 아킬레스의 방패와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데스로의 좌천과 같은 의미에서 예언적이다. 따라서 아에네아스의 방패는 신화, 역사 그리고 예언을 결합하는에, 이는 이러한 전통의 후기국면에서는 본질적임을 보여주는 결합이다.
제9장 아폴로니우스의 에라토에 대하여서에서 버질은 종지부로 향하면서 칼리오페를 불러내고 있다. 제11장에서, 아에네아스는 “신들을 경외하는데 있어서 최초인 사람”으로 언급된다. 결과적으로, 일부 후대의 독자들은 아에네아스를 서사시 영웅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신부로 간주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의 경건함을 알레고리적 서사시가 취할 새로운 신학적 방향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5
우리는 이 새로운 신학적 흐름을 보기 위해서는 프루덴티우스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단테나 버질의 후예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버질 다음의 세대 내에 오비드가 왔고, 오비드가 강력한 전임자에 몰입하며, 문학사상 가장 엄청난 계승투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의 일부는 패튼, 이카루스의 이야기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손으로 오비드 자신의 추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신학으로 말한다면, 변형(Metamorphoses) 보다 더 간결한 편집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인가? 창조, 최초의 인간, 보편적 죄, 홍수 그리고 그의 여파에 관한 설명으로 서사시를 시작하는 어떤 로마제국인도 히브류신앙을 좀체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성경을 읽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은 초점을 놓치는 것이다. 세익스피어와 휘트만처럼, 이 코스모폴리턴 오비드는 위대한 이야기꾼이었다. 오비드는 마치 책을 통해서든 다른 것을 통해서든 런던사람이 이탈리아를 공부하고, 뉴욕사람이 인도를 공부하듯이 이스라엘을 공부하였다. 에즈라파운드에게 있어서 오비드는 공자와 함께 2명의 신뢰할 수 있는 종교의 지침서중 하나였다. 유머가 많지 않은 사람인 파운드는 2천년 동안 서구의 시인들이 대부분 그러하였듯이 오비드를 진지하게 탐구하였다. 이것이 알레고리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상당히 많은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반어적 형식으로 진지한 문제를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 고전적 수사학자들은 알레고리를 일종의 반어법 형식으로, 또다른 수사학자들은 일종의 의인법으로, 그리고 또다른 수사학자들은 장식(아리스토텔레스는 kosmos라고 했다)으로 간주한다. 오비드는 그가 저술한 모든 것에 최소한 2개의 대립적 태도를 투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완전한 반어법적 시인이다. 오비드는 또한 피니(D. C. Feeney)가 “의인법적 알레고리,”“궁극적으로 유럽의 시적 이야기에서 우뚝 솟게 된 것으로서 인간행동을 반영하는 대안적 방식”이라고 말한 것을 창조하였다. 앙구스 플레처(Angus Fletcher)에 의하면, kosmos, 혹은 알레고리적 이미지는 “시각적 양상”을 강조하며, 보다 엄밀하게는 “시각적 혹은 상징적 ‘고립'"을 강조하며, 그리고 ”우주“와 ”“어떤 위계질서의 순위를 함축하는 상징”을 의미한다. 고든 테스키(Gordon Teskey)에 의하면, 알레고리는 병렬적, 지엽적, 그리고 에피소드적이며 그리고 본 이야기에 관련없는 도상적 세부사항들을 도입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방식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언급들은 오비드의 작품에 많은 조명을 가하고 있다. 도덕적 오비드(Ovide moralise)와 르네상스 독자들이 증언하듯이, 우리만이 오비드를 알레고리적인 것에 관련되는 문학가로 간주하는 최초의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비드가 본질적으로 알레고리와 관련된 작가라고 주장하는데 있어서는 최초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병렬적 표현에 관해 논의해보자. 악명높게도 오비드는 2백50개의 이야기를 그러한 방식으로 결합하였던 바,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테마에 의거한 주요 구조적 집합을 알 수는 있지만, 종속관계 혹은 통일성의 일반 원리는 어떤 것도 구분할 수 없다. 변형(metamorphosis) 조차도 적절한 원리는 아니다. 대부분의 서사시적 나레이티브는 digress하지만, 오비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련의 생각 혹은 이야기 진행을 interrupt했던 최초의 사람이다. 오비드의 서사시 보다 더 에피소드적인 장편시는 없다. 말하자면, 어떤 장편시도 그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자족적 단위들로 구성되어 잇지 않다. 오직 페트라르크와 그의 일련의 소네트 만이 누군가를 장편시의 알레고리적 단위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테니슨과 그 외의 근대작가에게 있어서, 장편시를 에피소드적으로 쓰기위한 유행이 확대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오비드가 “시각적 양식”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회화적 추종자 무리들 역시 오비드의 나레이티브 에피소드들은 서로 각각이 “시각적 혹은 상징적 ‘고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이들의 도상적 세부는 종종 어떤 긴 나레이티브와도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고 증언한다. 그 이유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긴 나레이티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초로부터 현재까지 시의 틀은 나레이티브가 아니라, 단지 출발점(terminus a quo)이자 종착점(ad quem)이다. 오비드의 새로운 개인화 알레고리들(제2장 질투, 제8장 굶주림, 제11장 잠 그리고 제12장 루머를 볼 것)은 단테를 통해 스펜서와 밀튼으로 이어지는 길을 우리들에게 열어주고 있다.
행위에 있어서 지속적이지도 않고, 도덕성에 있어서도 명쾌하지 않은 변형(The Metamorphoses) 역시 애매한 음조를 띠고 있다. 따라서 모든 알레고리가 그렇듯이 해석의 책임은 독자의 몫이다. 시는 우주론과 함께 시작하며, 그 때부터 신학, 신화, 역사 그리고 경험에 귀속된다. 종종 상호 결합되기도 하는 우주적인 것, 신성, 준신성, 영웅적인 것 그리고 보통의 유한자 요소들과 같은 5단계의 알레고리적 도식은 그렇게 해서 선보이게 된다. 이 시의 앞부분은 사랑을 강조하며, 뒷부분은 전쟁을 강조하는데, 이 두개의 주제는 오비드가 되풀이 했던 이야기인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처럼 상호 관련되었다. 이와같은 알레고리적 상호작용은 르네상스 시대에 많은 지지자가 나타나게 된다. 이들 중에는 아리스토토, 타소, 시드니 그리고 스펜서가 있는데, 이들은 헤라클레스의 두개의 국면으로서 알레고리적 결합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오비드를 계승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큰 폭으로 오비드의 알레고리적 특징들에 관해 언급하여 왔다. 단 한개의 에피소드 즉 허브리스의 알레고리인 패튼과 태양의 전차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아폴로신의 제단 문턱의 erphrasis로서 표현되는 오비드의 이야기는, 호머와 버질의 방패와 마차가지로, 일종의 삽입된 알레고리(inset allegory)이다. 사계에 함께, 패튼이 하늘을 가로질러 나아갈 때 따랐던 날, 달, 년, 세기 그리고 시간과 같은 알레고리적 인물들은 그의 나레이티브에 포함되어 있다. 오비드는 태양에 출석한 보다 더 알레고리적 인물들인 섬광, 새벽, 불 그리고 화염과 함께 확립된 어떤 알레고리적 우주로서 조디악 하우스를 소개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전체 에피소드는 불의 신을 홍수를 일으키는 물의 신과 대비 그리고 이 나레이티브의 결론부에서 태양의 열을 푸념하는 대지의 신과 대비시킨 아치형의 초보적 알레고리의 일부이다. 이들 3개의 다산적 요소들은 물론 보완적이기도 하다.
나머지 지면에서는 오비드의 헤시오드, 아라투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에 관한 알레고리로부터 호머, 아폴로니우스 그리고 버질에 관한 알레고리로 나아가 보자. 트로이의 전설을 재구성해서, 오비드는 호머적 도식을 확장하고(오비드는 트로이의 근거 뿐만 아니라 오딧시우스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서사시적 이야기를 최소화하고 있다(제7장에서, 그는 트로이 전쟁을 6개의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후에 오비드는 버질과 여러 면에서 동일한 작업을 한다. 즉 전설적 로마를 최대한 설명하고 나서는 단 두줄의 거의 희극과 같은 문체로 요약한 아에네이드의 최종 6부의 책을 윤을 내고 있다. 전적으로 공상적 관심으로 흐른 4개의 문장으로, 오비드는 디도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있다. 제8부에서 마치 자신을 세밀화가로 나아가려고나 하는 듯이, 오비드는 오딧세이와 일리어드를 다음과 같은 하나의 경구로 환원한다: “마음은 근육 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갖는다.”따라서 요약과 그와 동일한 일반화는 오비드의 알레고리적 테크닉의 핵심적 도구이다. 그에 의해 이야기는 추상화되게 된다. 오비드는 일부 알레고리의 테크닉은 그의 스승들로부터 배웠다. 일리어드 이야기를 열거함에 있어서 오딧세우스적 요소를 확대하는 방법은 버질로부터 배웠고, 아이아스와 오딧세우스 사이의 전투를 연출함에 의해 호머를 요약하는 방법은 호머 자신으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아폴로니우스적 재료를 트로이의 설명으로 도입하는 방법에서 버질과 아폴로니우스는 자신의 영웅을 오딧시우스의 지평으로 데리고 갔다. 마찬가지로, 오비드는 후기 호머적 재료를 추가한다. 여기에서 오비드는 버질를 따랐고, 단테와 그 외의 사람들을 위한 방향을 제시한다. 트로이로부터의 출발에 관한 오비드의 처리는 이 두개의 호머적 시를 또다른 버질적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연결한다.
오비드에게서 어떤 일관적 철학을 추구한 사람들에 의해 너무나 진지하게 고려되는 문제의 제15장은 피타고라스와 고전적 사상의 일반적 진지함을 벗겨내고 있다. 범로마주의를 승인함에 의해, 오비드는 에리스의 신화와 반대되고 있다. 이 시의 전반적 진보에 역행하여, 오비드는 정치적 시저를 한 역사적 인물로 기념하고, 그리고 나서 시저를 신적 존재로 묘사하므로서 스스로 여러 별들 사이의 어떤 우주적 위치를 마련한다. 이중의 풍자로, 이 유한한 황제는 시저스 자신이 제식의 지위를 수여했던 여신이 비너스에 의해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여하간에, 오비드의 신적 예언은 아에네이드 4의 단순한 정치적 예언으로 나아가게 된다. 아에네이드의 비인간적 후예인 오비드는 오르피우스라는 보다 깊은 신화에 의지하여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오비드가 또한 그의 불가지론에 있어서, 신화, 역사 그리고 정치학에 대한 그의 평범화에 있어서, 그의 자멸적 패로디에 있어서 반알레고리적임을 주목하여야만 한다. 여기에 있어서 오비드는 바이런을 예언한다.
6
필자는 두명의 친구가 있다. 한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자인 친구는 단테를 집어 들고는, 어떤 여행을 했던 한 이탈리아인이 쓴 장편시를 읽었다고 말함에 의해 기독교인인 친구를 분개하게 만드는데 취미를 가졌었다. 필자는 또다른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 역시 신앙을 갖고 있고, 또한 단테 연구가이기도 하다. 이 친구는 칠대죄악에 대한 이 시인의 처리에 있어서 알레고리를 인식하기도 하였지만, 신곡을 전반적으로 알레고리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와 같은 무신론자는 이 시를 전적으로 알레고리적이라고 간주한다. 물론 필자는 단테를 자신의 작품에 대해 오히려 혼란스런 비평가로 간주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장편의 나레이티브가 일관되게 4단계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일한 전통에서 성장하였고, 이들 중 3명은 기독교인이고, 이들중 4명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 5명의 독자들 사이에 그와같은 근본적 불일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는 아주 간단하다. 알레고리적인 것은 정의와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작품에 친하기 않은 이 독자는 어쨌든 신곡의 논점이 모든 문학에서 가장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신곡의 보편적 호소력은 무엇인가? 아주 소수의 독자들만이 전체의 시를 오리지날로 최근에 읽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곡의 언어의 아름다움, 시상, 혹은 정서적 영향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자 한다. 신곡의 서사시적 논의, 신곡의 사상, 말하자면 신곡의 알레고리에 있어서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인가? 하지만 우선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요약하여야만 하고, 도로시 세이어즈에게서 어떤 지침을 구할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알레고리는 이미지를 통한 경험의 해석이다”라고 말한다. 단테의 시는 “신으로 향하는 길목의 알레고리이며,” 신을 향한 영혼의 탐구의 알레고리“이다. 단테는 신의 현현의 행복에 대한 자기 지식과 정화를 통해 이 위대한 회개의 작품과 모든 사물의 회기를 쓰기로 결심하였다.”많은 기독교적 알레고리와 대비해서, 단테의 알레고리는 “상징적 인물들에 관한 알레고리”로서 거기에는“훨씬 많은 수의. . .인물들이 상징적 이미지가 된다.”자신의 여정에서 (“모든 기독교적 죄인의 이미지로서”) 단테는 (“영혼 내의 악의 심화된 가능성의 이미지로서”) 지옥, (“영혼이 죄를 정화하게 되는 회개의 이미지로서”) 연옥 그리고 (베이트리체에 의해 상징된 “은혜의 상태에서의 영혼의 이미지로서”) 낙원을 경험한다. 그녀는 말하기를, 단테의 호소력은 “자신의 잃어버린 여인을 찾기 위해 저승을 탐험해야하는” 연인의 이야기와 많은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여행하는 이 지옥은 무엇이며,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이 낙원은 무엇이며, 그리고 이들 사이에 놓여있는 연옥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옥은 죽음이며, 천국은 생명일 수 있는가? 혹은 그와 반대일 수 있는가? 지금 살펴 보건데, 우리는 알레고리를 논의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지옥은 악이고 천국을 선인가, 혹은 우리는 이를 뒤바꾸어 왔는가? 대부분의 독자들은 지옥을 통한 자신들의 여행을 전적으로 증긴다. 반면 천국이 매력적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양의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렇다. 동양의 독자들은, 아마도 단테가 의도했던 바와 같이, 이 시를 완전히 대칭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버질의 직접적인 문장에서 시인들을 직접적이지 않은 그 무엇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단테는 어떤 다른 도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가? 단테가 로타 베르질리아나(rota Vergiliana)를 취하고 이를 뒤바꿔서, 아에네이드를 지옥을 위한 모델로 하고, 게오르직스(Georgics)를 연옥의 모델로 하고, 에클로그스(Eclogues)를 천국의 모델로 삼는 것이 가능했을 것인가? 여러 원형들의 도치와 조정은 단테 자신의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단테의 서사시는 어떤 여행과 흡사하지는 않다. 물론 단테의 위트를 아에네아스의 진전, 혹은 오딧세우스같은 귀환(nostos)의 보다 오래된 패턴에 안착하는데 쓰여졌을 수도 있다. 사실상 단테는 지옥으로 내려가고, 산 위로 되돌아 와서 보다 높이 천국의 이미지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높고 낮음을 경험하였고, 또한 어떤 더 높은 원리를 추구할 수 없는가? 단테는 매우 독창적이며 분명히 보편적이다. 단테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즐거움을 솔직하게 인정한데서 개인적이며, 자신의 중년의 위기에 관한 세부를 예행연습한데서 자기 중심적이다. 국가, 가족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추방된 자로서, 단테는 내면적으로는 공동사회의 영혼들 보다 더 행복하다. 결과적으로, 단테는 자신의 자유를 공유하는 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자들 두 부류의 관객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단테는 이 세상에서 어쨌든 자신의 이상적 여인을 갈망하는 운좋게 결혼한 남자(그는 그랬던 것 같다)로 표상된다. 또는 상상적으로는 단테는 자신의 다양한 모든 환상을 가진 호색의 고독한 존재로 표상된다. 왜냐하면 단테의 시는 환상이자 더 깊은 환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단테에게 있어서 모방적 기반의 결핍은 독자가 단테의 주요한 결점으로 간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아 왔듯이, 단테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거부했던 것을 추구함에 의해 승리한다. 동일성을 스스로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아에네아스이며, 단테는 폴이다. 단테의 수줍음은 이들 독자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또다른 특징이다. 단테는 버질과 베아트리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의 학도임을 가장했지만, 사실상 스승이다. 호레이스 이래로 최근까지 시의 이론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가 가르침을 추구하여 왔지만, 사실상 그러한 가르침에 진정으로 우리가 즐거움을 갖게 되었는가? 단테는 우리를 은연 중 깨닫게 한다. 왜냐하면 단테가 즐거움을 경험할 때,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자신이 배웠지만 또한 잊어버린 버질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역설을 화려하게 구현하고 있다. 그와같은 스승-제자 관계가 이 고전적 서사시를(피닉스와 아킬레스는 사소한 예외일 뿐이다) 성가시게 하지는 않는다. 물론 단테의 서사시는 인도의 서사시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지만 말이다. 이 관계는 분명 단테의 시를 보편적이게 한다. 특히나 스승은 부분적으로는 실패의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버질은 최소한 단테의 시적 구도 내에서는 할애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단테는 버질, 스타티우, 성 버나르 그리고 특히 베아트리체와 같은 훌륭한 스승들을 갖고 있는 운좋은 사람이다.
신의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정의를 위한 단테의 시의 엄청난 탐구는 복수의 원리의 상징적 승화인 징벌의 원리에 의해 오점을 남겼다고 우리는 느낄지 모른다. 단테의 지옥은 결국 일종의 가학 피학성 변태성욕의 천국(a sado-masochistic Heaven)이다. 이는 또한 이 책의 보다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닐 수도 있는 특징인 것이다. 단테의 문화적 편견과 배타성은 이들 독자들에게 한결 덜 매력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 어쨌든, 인간의 고뇌 이야기에 대한 단테의 희극적 처리는 일리아드, 아르고노티카, 그리고 아에네이드 혹은 심지어는 오딧세이와 메타모포시스의 마지막 처리 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것으로, 이론상 희극적 범위 내에서 비난을 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사실상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단테는 자신의 오비드를 보다 더 신중하게 고려하였을지도 모른다.
신곡이 후세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에 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서사시 작가로만 제한하고, 그리고 오로지 단테, 초서, 스펜서 그리고 밀튼, 블레이크, 워즈워드 그리고 칼라일, 포프, 바이런 그리고 조이스 영국작가 들만을 살펴볼 것이다. 그 중에도 단테는 탁월하게 많은 독자가 있다. 신기하게도 단테를 가장 사려깊게 연구한 사람들은 단테에 관해 말할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초서는 단테를 비켜나간다. 물론 신기가 있는 단테가 초서의 드림 알레고리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트로일루스(Troilus)와 크리제이드(Criseyde)에서는 무시되고 있다. 스펜서에게서는 단테에 관해 전혀 언급이 없다. 밀튼의 작품에서는 단지 약간의 비평적 언급만이 있을 뿐이다. 스펜서와 밀튼 양인은 이탈리아어와 라틴어 텍스트를 읽을 수 있었고, 학자들에 따르면 양자는 단테의 작품을 접근하였다. 스펜서는 신곡을 밀튼은 신곡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작품을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데이비드 월러스는 밀튼이 “모나키아(Monarchia)를 알았고, 콘비비오(Convivio)의 사본을 소장했으며,” 그리고 “비타 누오바(Vita nuova)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단테의 영향력의 증거는 우리 눈에 너무 명백해서 우리는 이를 바라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요정나라의 여왕(The Faerie Queene)(제1-2장, 3-4장, 5-6장)의 3부분으로 나뉜 구조는 신곡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독자들이 밀튼의 주요 작품 즉 실낙원, 투기사 삼손(Samson Agonistes), 복낙원(Paradise Regained)의 순서로 간주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펜서와 밀튼의 첫 양상에서, 원죄의 원리가 엿보인다. 이들의 중간 양상에서, 두 작가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지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마지막 양상에서, 이 두 작가는 이상적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데, 스펜서의 경우에는 정의와 예의의 세계를, 밀튼의 경우에는 다시금 낙원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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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문필가 이전의 페트라르크와 보카치오처럼, 아리오스토와 타소는 단테의 여러 불길한 성향에 응답하고 있다. 자신들의 강력한 선지자들의 명성에 복종한 이들 아첨자들과는 달리, 아리오스토와 타소는 단테를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시에서 중요한 특징들은 단테의 신곡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아리오스토는 소위 신곡의 환상적 특징이라고 하는 것을 발전시키고, 타소는 신곡의 알레고리적 특징을 발전시킨다. 이 두 16세기의 작가들은 페트라르크가 강화했던 단테의 개성을 피해나가고, 비록 세속적인 방식이긴 하나, 보카치오가 메아리쳤던 현실도피적 요소(보카치오의 만담가들은 역병이 만연한 플로렌스에서 쾌적한 장소인 한 교외로 도망친다)를 피해나간다. 로망스를 고유한 알레고리적 이론으로 병합했던 타소와는 달리, 아리오스토는 자신의 소설의 재료에 만족하고, 이들 재료들을 즉각 중세의 그의 선배들 보다 더 환상적이고 더 사실적인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렇게 하므로서, 아리오스토는 소설에서만 완전히 나타나는 알레고리적 족쇄로부터 모방적 나레이티브의 해방을 예언한다. 버질과 마찬가지로, 아리오스토는 훨씬 제한된 에스테의 하우스(House of Este)로서 어떤 제국을 찬양하며, 이를 위해 아리오스토는 자신의 이야기를 버질의 것에 기반을 둔 기초신화(foundation myth)를 제공한다. 하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그에게 앞서서 단테와 마찬가지로, 아리오스토는 로마제국을 유럽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솔직한 에로적 주제를 통해, 아리오스토는 단테의 숭고화된 경건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독신과 마리아의 처녀성의 숭배를 자신들의 성적 관심과 조화시키기 위해 고심하여 왔던 다른 사람들을 타도하고 있다. 광란의 오를란도(the Orlando Furioso)가 여러 알레고리적 인물, 에피소드 그리고 보다 큰 소재를 구현하고 있지만, 아리오스토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전통 상에서 가장 비 알레고리적 작가이다. 대부분의 서사시인들과는 달리, 아리오스토는 구술낭송을 위한 시를 생산한다. 아리오스토의 시의 도덕적 진술들은 대체로 즐거움과 자기미화의 보다 일차적 요구를 원하는 관객들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이바지한다. 타소와는 달리, 아리오스토는 자신의 작품에서 알레고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아리오스토는 또한 자신의 주제를 자신이 수용한 논쟁의 영역 이상으로 기독교화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아리오스토는 둘다 중요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무력적인 것 보다는 연애적인 것을 선호한다. 독창성의 화려함과 풍부함에서 아리오스토는 거의 오비드를 능가하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서사시인이라고 해도 당연할 것이다. 보이아르도의 기존 기념비적 나레이티브를 자신의 동등한 기념비적 나레이티브로 지속하려는 아리오스토의 결정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비롯되고 단테를 통해 진행되고, 스펜서와 밀튼에 이르러서 재개된 양피지 모방의 전통을 뒤집는다. 그러한 결정만으로도 아리오스토의 해방적 천재성을 증명한다.
그의 낭만적 외관 이면에서 그리고 그의 변덕스러운 분리상태에도 불구하고, 광란의 오를란도는 중세와 르네상스 사상의 특징적인 보다 깊이 있는 알레고리적 프로그램을 반영한다. 단테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movere et docere의 시적 원리에 부응하여, 광란의 오를란도는 교육에 관한 어떤 알레고리를 구현한다. 버질 그리고 보다 적절하게는 버질에 관한 16세기적 이해의 방식을 모방하여, 광란의 오를란도는 완벽한 왕자의 알레고리를 구현한다. 오를란도와 구기에로 양자를 위한 여기에서의 모델은 헤르쿨레스인데, 헤르쿨레스는 복합적 주인공으로서 그의 12 고행은 그의 인격의 12 국면을 알레고리화하고 있다. 우리는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상으로 헤르쿨레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는 오딧세우스나 아에네아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오를란도는 아리오스토와 다른 사람들의 주인공을 위한 소위 (확장의 반대로서) 압축된 메타포를 제공하고 있다. 오를란도는 또한 선과 악 사이의 대립에 있어서 양극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르네상스의 유형으로 파리스에 의해 표상되고 있다(예를 들면, 파리스의 악의 선택과 오를란도의 덕의 선택 사이에서의 란디노의 논쟁을 보라). 마찬가지로, 아리오스토의 나레이티브는 또다른 르네상스의 토포스인 천상의 비너스와 속세의 비너스 사이의 대립에 관해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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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자에 대한 눈을 가진 누구라도 오를란도 푸리오소와 제루살제메 리베라타를 알레고리적 인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무리 아리오스토와 타소가 이들을 교묘하게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의 리스트를 집대성하거나 이들 대부분의 관습적인, 즉 고전적이며, 중세적이며 그리고 르네상스적인 관념들에 관한 주석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타소의 편지와 여타의 비판적 글에서, Discorsi del poema eroico는 그의 이론에 관해서 그리고 알레고리아에서는 서사시에 관해서 타소의 글의 요약은 우리가 알레고리의 전통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엄청나게 재능을 가진 비평가로서 타소는 자신의 사상이 전개될 때의 약간의 불합리성과 빈번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사시에 관한 가장 영향력있는 이론가로 우뚝 솟는다. 타소의 작품은 그렇게 높게 간주되기 때문에, 스펜서는 요정의 여왕(The Faerie Queene)의 집필 중 잠시 멈추고는 제루살레메(Gerusalemme)의 최근판에 몰두했을 수도 있으며, 밀튼은 타소의 이론이 실질적으로는 실낙원이라는 프로젝트를 정의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타소은 대부분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한가지 시각을 가졌다. 로망스를 고전적 서사시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타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어떤 로망스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의견도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타소는 단발식 플롯 보다 에피소드적 플롯이 우수함을 주장한다. 타소는 이탈리아의 천재들과 이탈리아 언어의 특성에는 많은 행위를 갖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시학의 한 구절에서 타소는 서사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경탄스러운 것(the marvelous)이라는 관점을 개발하고, 타소는 이를 교묘하게 있을 수 있는 것(the verisimilar)의 개념과 동질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장선상에서, 타소는 서사시가 신적 행위와 자연의 작용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모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수사학과 윤리학을 시학으로 병합하는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타소는 나레이티브는 수사학이 아니라 실체이며, 윤리적인 것은 양식적인 것이 아니라 예절이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보다 중요하고 심지어는 보다 상상력을 발휘한 변형에서, 타소는 알레고리를 보편적인 것의 개연적인 모방(the verisimilar imitation of the universal)으로 정의한다. epideictic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로서 타소는 비극과 구분되는 것으로의 서사시는 지고의 덕과 경건함의 훌륭한 동인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타소는 이러한 담론에서 우리는 지고의 즐거움을 갖게된다고 말한다. 보다 더 엄격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서 역사를 논술한 카스텔베르트로에 반대하여, 타소는 창조(invention)를 서사시에서 보다 높은 원리인 것으로 주장한다. 타소는 역사가 종교와 상호 얽혀있기 때문에, 지고의 서사시적 진실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환상적 상상력을 주장했던 플라톤주의자인 마쪼나에 반대해서, 타소는 the icastic을 주장하고, 이것이 실재의 idoli를 수립한다고 말한다. 타소는 사랑이야말로 서사시의 가장 위대한 주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서, 타소는 특징적인 발뺌으로, 신앙, 교회 그리고 제국은 이보다도 더 위대한 주제라고 주장한다.
타소의 알레고리에 대한 정의는 우리들에게 특히나 흥미를 준다. 서사시인(혹은 영웅시인)은 신이 자신의 창조물을 빗듯이 자신의 시를 빗는다고 그는 말한다. 시인의 알레고리는 시인의 이데아(cp. 시드니의 “fore-conceit")이며, 시인의 진리이며, 시인의 영혼이다. 그것은 ”인간삶의 거울에 비쳐진 도상“이다. 서사시인이 추구하는 가장 높은 진리는 보편성의 진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재정의하여, 모방은 단순한 외적 실제의 재현이 된다. 왜냐하면 타소는 말하기를 알레고리 자체가 인간의 내적이며 윤리적 삶을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문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다하는 지점에서 시작하며, 이는 말하자면 상상력이 시작하는 순간이 된다. 타소가 이제 알레고리로 동일시했던 시를 타소는“우리에게 인생을 사는 법을 가르치도록 만들어진 인간행위의 모방”이라고 부른다. 어떤 결정적이고, 설레게 하는 반전으로, 타소가 초기에 알레고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모방은 상상력을 통해 이제 핵심적 방식이 되고 있으며, 모방에 의해 시인은 알레고리를 성취하는데, 이는 그 자체로 “보편적 이데아”로 정의되어져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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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탈리아의 서사시와 로망스의 이론은 선녀왕(The Faerie Queene)의 구조와 알레고리를 형성하는 효과를 가졌다. 민투르노(Minturno)는 서사시를 “어떤 모범적 개인에 의해 결말까지 수반되는 어떤 기억할 만한 행위를 모방”한다고 함에 의해 “일련의 기사와 여인들 그리고 전쟁과 평화를 대상으로 갖는” 로망스와 구분된다고 말한다. “로망스에서, 기사는 저자가 다른 모든 것 이상으로 영예롭게 하기 위해 특별히 다루어진다”고 그는 말한다. 스펜서는 이를 아더 기사와 그의 배우자 글로리아나라고 부를 것이다. 아리오스토의 전기작가인 파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로망스는 이미 여러 인간들의 여러 행위들을 그리지만, 그래도 다른 모든 사람들 이상으로 한 사람이 찬양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로망스 작가들은 단일한 인물을 취하는데 있어서 서사시인들과 생각을 같이 한다. 하지만 서사시인들과는 달리 이들은 어떤 단일한 행위 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토스카넬라(Toscanella)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전인적 인간으로 가꾸기 위해 시인들은 여러 인물에 여러 덕을, 한 인물에게는 하나의 덕목을, 그리고 다른 인물에게는 다른 덕목을”둘 것을 권장한다. 여기에서 전인적 인간이란 말은 아에네아스에 관한 르네상스적 이념화를 반영하고 있다. 14세기에 이미 버질의 “목적과 주제”(end and subject)를 “전인”으로 요약했던 페트라르크는 경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마치 버질이 아에네아스를 기술하고 있기 보다는, 아에네아스란 이름을 가진 이 용감하고 전인적 인간이 기술하고 있는 듯 하다.”
이와같은 총괄적 사고방식은 스펜서 자신의 로망스-서사시라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한다. 스펜서의 로망스-서사시에서 최고의 영웅인 아더는 50개의 화신, 혹은 스펜서가 애초에 계획했던 24개의 화신으로 연속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스펜서는 자신의 여섯 개의 알레고리적 덕목을 6개의 책(성스러움, 절제, 순결, 우정, 정의 그리고 예의)에서 표상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어떤 철학적 결론인 여러 성품의 알레고리아를 덧붙이고 있다. 왜냐하면 일부는 이 덧없음의 책(the Books of Mutability)들이 최초의 6개의 책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의거해서 스펜서가 6개의 항구성의 책들을 더 제공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존하는 책들은 다른 중요한 알레고리적 배열을 갖고 있다. 즉 짝수는 기독교적이며, 홀수는 고전적이다. 짝수는 기사들을 영웅으로 갖고 있으며, 홀수는 요정들(Elves)을 영웅으로 갖고 있다. 버질과 오비드에게 깊이 영향을 받았지만, 스펜서의 일반적 개념은 고전적이라기 보다는 중세적이다 (그의 기사들은 아퀴나스가 주입된 덕이라고 했던 것을 표상하며, 그의 요정들은 획득된 덕을 표상한다). 또한 그의 개념은 중세적이라기 보다는 (그것은 역사적, 알레고리적, 도덕적 그리고 이상적 수준의 4가지 감각(quatre-sens)이 결여되었다) 르네상스적이다(전체는 기독교적 휴머니스트의 종합이다). 또한 그것은 르네상스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기하게도 근대적이다(단테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두는 시인 그 자신의 인물 내부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독자들의 심리학 내부에서 내면화되어 있다).
스펜서의 책은 보기보다는 대칭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일시적이거나 혹은 경험적 동력에 의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의 책은 나머지 시를 위한 원리적 기반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개별적 책들 보다 더 중요하다 (오래된 이야기들을 열거함에 의해 호머 보다 자신을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 아폴로니우스의 선택과 같은 수단으로, 밀튼은 스펜서의 현현 Revelation 의 선택을 그의 창세기 Genesis 의 선택과 함께 그 자신의 성서적 텍스트로 설명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요소와 고전적 요소를 균형을 갖추고 종합한 처음 2개의 책은 전체 시의 방식을 간직한 어떤 모델을 수립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들 처음 2개의 책은 단테의 신곡의 처음 두편 그리고 실낙원의 처음 두개의 장과 같으며, 이들 3개의 예들은 이들을 부분으로 한 더 큰 작업을 요약하고 있다. 자신의 각 책에서, 스펜서는 자신의 주제인 자존심의 집(I), 행복의 집(II), 아도니스의 정원(III), 비너스의 사원(IV), 이시스의 사원(V) 그리고 아시데일산(VI)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 알레고리적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아도니스의 정원이 “고전적”이지만 “기독교적” 장(book) 내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또다른 동인을 이해하게 해준다. 즉 기독교적 테제(I), 고전적 안티테제(II) 그리고 기독교적 휴머니스트의 진테제(III)는 IV장, V장 그리고 VI장에서 반복되고 있는 패턴이다. III장과 IV장은 3쌍의 대비되는 장들 중 하나인데, 마찬가지로 어떤 연속성을 형성한다. 브리토마트가 디도와 아에네아스 양자를 포함하고 있는 버질류의 알레고리 배너 하에서, 스펜서는 그녀와 그녀의 탐구를 사랑과 전쟁, 혹은 일종의 변증법적 알레고리의 견지에서 비너스 대 마르스로 더 한층 알레고리화한다. 그녀의 두 화신 즉 벨푀브와 아모레트에서, 브리토마트는 또다른 알레고리인 천상의 비너스와 지상의 비너스을 만들어낸다. 트라이어드에서 세 번째인 플로리멜은 이 처음 두개를 융화해서, 사랑을 어떤 우주적 지평으로 가져가고 있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분류에 부응하여, IV장은 아테, 번뇌의 신 그리고 불화의 신의 등장인물들을 도입하고 있다. 다음의 V장은 브리토마트에 의해 III장과 IV장에 연결되고 있다. 브리토마트의 아르테갈의 추구는 IV장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사실상 요정여왕(The Faerie Queene)의 각 장은 II장에서부터 이전 장을 완성하는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또다른 일련의 알레고리적 쌍을 발생시키고 있다. V장에서 스펜서는 정의를 헤라클레스의 알레고리화에 기반을 둔 일종의 정치적 알레고리를 제공하고 있다. VI장은 마치 이후의 낭만주의적 전통에서 알레고리적인 것을 미리 비추기나 하듯이, 알레고리적인 것으로부터 낭만주의적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요정여왕이 격세유전적 알레고리로부터 문화적 혼합주의를 거쳐 로망스의 다원적 방식으로 진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서구문화를 한층 더 개관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시의 통합적 원리인가? “아더와 크리스도라는 인물에서의 자유로운 신념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밀접한 관계를 획득한다”라고 C.S. 루이스는 쓰고 있다. “하지만, 문자적 아더에서 이론적인 것까지의 직접적인 도약은. . . 기독교적 정서에 반감을 줄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플라톤적 지평은 중간의 결합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아더라는 인물을 철학적 의미로 제시하는 것은 이의가 없었으며, 또한 플라톤적 아더는 또한 기독교적인 것과 쉽게 융화되었다.“ 요정여왕은 신성할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시임을 루이스는 암시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또한 신학적이며 어떤 점에서는 역사적이다. 그것은 또한 신화적인가? 달리 말해서, 스펜서의 시는 서사시인가 아니면 그저 플라톤화된 기독교의 로망스인가? 우리는 후기에 스펜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비평가들 즉 불가지론자들의 주장에 매료되어서, 그의 방식은 “진리에 대한 진리의 클로징업(closing up)”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인 C.S. 루이스와 함께 출발하였다 : 성스러움은 마운트 에시데일이 “시의 알레고리적 핵심”이라고 묘사했던 예의로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시의 알레고리적 핵심은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원리임에 틀림없다.
스펜서는 규정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어떤 방식에서 그는 신학에 있어서 엄격하게 토마스적이지만, 알레고리 작가로서는 개인주의적이며 근대적인 단테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단테의 명시적 부인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아에네아스이며, 폴인가를 살펴보았다. 구욘의 고뇌의 내부적 혹은 심리적 알레고리를 통해 우리들 자신과 그 자신에 유사한 과정을 묘사한 스펜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 스펜서의 시는 아에네아스의 또다른 르네상스의 알레고리적 방식 즉 정신의 과정을 알레고리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단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랑크 커모드는 “구욘은 인간에서 준신의 덕목으로, 인간에서 신적 성찰(phronesis)로의 정화적 과정에서 자연적 습관의 저급한 절제에서 한 영웅의 덕목으로 나아가게 되며, 이는 모든 주요한 덕목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구욘의 모델을 그는 신약성서에서 광야의 그리스도의 표상에서 발견한다. 간단히 말해서, 아더의 화신으로서 구욘은 영웅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폴과 아에네아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존 휘트만이 주장하듯이, 알레고리적 이해는 개종을 향하는 과정으로서 성경적 주해와 유사하다. 스펜서의 요정과 같은 영웅은 그의 개종을 통해 일종의 기독교적 신사가 되는데, 이는 스펜서가 랄레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교육적 서사시를 특화하기 위한 “일반적 목적”임을 우리는 기억한다. 구욘의 구원의 과정에 자신의 참여를 통해, 스펜서는 단테와 마찬가지로 독자와 시인을 위한 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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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야심차게 시작한 당대의 일부 이상적 문집의 첫 페이지 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사랑하는 로라의 성스러운 것, 다른 말로는 우상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고백하는 페트라르크 시인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이 문집의 마지막 페이지는 독자들에게 스페인의 도로 상에 놓여진 한 미친 하급귀족을 마주치게 할 것이다. 이 미친자는 한 무리의 여행하는 상인들에게 자신이 결코 본 적이 없는 조금은 가상의 여인의 초자연적 미를 그에게 고백하도록 부추키고자 한다. 보라, 이 몽상가가 왔다. . . .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그의 인생전체는 알레고리의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자는 세익스피어가 아니라 돈키호테이다.
요정여왕 제2장의 서문에서, 스펜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in this faire mirrhour," "thine owne realmes in lond of faery"에서 영국을 바라보게 하였다. 도치(inversion), 그리고 그의 대응물로서 환위(conversion)는 일종의 알레고리적인 것(inversio랄 단어는 알레고리를 지칭하는 로마의 단어이다)이다. 마이클 무린은“스펜서는 이상적 세계는 실제적인 세계 속에 투영된다고 말함에 의해 진정한 세계가 이상적인 것 속에 투영되는 오래된 인습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이는 돈키호테의 광기적 방법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스펜서의 세계 즉 로망스의 세계와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이 아닌가? 노른베르크(Nohrnberg)는 위의 제명에서 생략된 문장에서“르네상스 문학”을 말하고 있는데, 그는 “그것이 주관과 객관의 관계를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상적 독립의 기반 위에 두었다고는 거의 얘기될 수 없지만, 르네상스 문학은 지식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 양자의 마인드 구축의 피할 수 없는 주관성을 암시하기 위한 결정적 동력으로 기술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르반테스의 걸작은 두개의 알레고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inversio로서 여기에서 Don은 실제적 세계에 반영된 이상적 세계를 상상하고 있으며, 또다른 하나는 conversio로서 여기에서 로망스의 세계는 기독교적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왜 여러 알레고리들 중 단지 한개의 알레고리만을 보는 비평가들(예를 들면 나보코프의 경우 단지 한개의 도치 만이 존재하며, 우나무노의 경우 도치와 정반대의 것 만이 존재한다)이 세르반테스를 이해할 수 없는 가를 설명해준다. 이 책에서 “최후의 가장 위대한 서사시”이자 “최초의 가장 위대한 소설”을 간파하는 비평가는 진실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하지만 돈 키호테는 진정 서사시인가? 또한 동시에, 그것은 진정 소설인가?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그 무엇,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적인 그 무엇으로 우리가 의미하는 용어로 비추어 본다면 사실상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니다. 하지만, “희극적”이란 술어를 우리가 첨가할 수 있다면, 이 경우 돈키호테는 서사시이자 소설이 되게 된다. 이 소설의 알레고리의 문제에 관해 살펴보자.
우리 모두는 돈을 이상주의자로, 그리고 산초를 현실주의자로 간주하기 때문에(이들의 역할은 물론 역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요점을 장황하게 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이 알레고리적이라면, 이 작품은 또한 서사시의 또다른 요건들을 만족시켜주고 있는가? 즉 이 작품은 신비적이며, 신학적이며, 역사적이며 그리고 경험적인가? 멀리 보지 않더라도“The Captive Captain's Tale"에서 세르반테스는 명시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이 이 책은 16세기 스페인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기독교적 신학이 패러디의 형태로 뿐만 아니라 엄격한 원칙으로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나머지 문제는 이 책의 지배적 신화를 동일시하는 것인데, 이는 이전의 신화에 의거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신화는 정확히 돈키호테라는 인물과 책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독자적인 칸트적“경험”으로부터, 세르반테스는 하나의 서사시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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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대한 해박함에도 불구하고, 밀튼은 자신의 작품의 근저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론에 가장 깊게 영향을 받았다. 일례를 든다면, 실낙원의 전원취미는 산나자로, 타소, 시드니, 스펜서 그리고 그 외의 작가들에 의한 오랜 전원적 작품의 일반적 예들과 함께 오름차순으로 영웅적, 철학적, 목가적으로 읽히게끔 서사적 주제들을 재정렬한 민투르노와의 관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밀튼은 “보다 영웅적인 논의”를 위해, 즉 우주론적이고, 신학적이며 윤리적 사색에 있어서는 철학적인 것을 에덴을 배경으로 선택함에 있어서는 목가적인 것을 위해 무협적 주제를 평가절하한 민투르노를 따랐다. 이와같은 낮은 단계로부터 이상적 상태로의 전원적인 것의 고양의 정점에서, 1659년 밀튼 자신의 서사시인 르네 라핀은 이러한 방식을 “순수한 상태의 완전한 이미지”로 재정의한다.
타소의 새로운 서사시의 알레고리 이론을 요약해보고, 이제 그의 주요 개념들을 실낙원에 적용해보자. 왜냐하면, 밀튼의 기독교적 주제들과 알레고리적 테크닉은 이 장르의 이와같은 재형성에서 많은 부분을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시적 모방의 주제로서 신적 행위에 대한 이 이탈리아 비평가의 인정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신의 의지는 실낙원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복낙원에서 너무나 현저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타소의 기적적인 것(the marvelous)에 대한 선호적 관점은 밀튼의 환상적 알레고리 방식, 즉 천국과 지옥, 신, 악마와 천사, 천상의 전쟁과 기타 허구적 소재들을 발달하게끔 유도한다.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거룩한 그리스도에서 반영된 영웅주의에 대한 밀튼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규범, 즉 지고의 덕과 경건함의 훌륭한 동인에 대한 타소식의 기독교적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카스텔베트로와 마찬가지로, 밀튼은 성서적 근본주의자를 위한 역사적 주제를 옹호하며, 타소와 마찬가지로 이를 다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창조(invention)를 옹호하고 있다. 상상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서 밀튼은 보편적인 것에 대한 있음 법한 모방의 개념을 창조한다. 타소는 최고의 서사시적 진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말한다. 밀튼 역시 기독교적 역사를 아담의 몰락에서 크롬웰의 통치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사의 구성을 위한 자신의 신학적 도식으로 삼고 있다. 밀튼의 시는 타소가 추천한 주제 즉 사랑과 신앙 두개를 결합하고 있다. 밀튼은 이 이탈리아인의 이론적 주장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타소의 관점 중 두개에 대한 밀튼의 옹호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서사시인은 마치 신이 피조물을 빗듯이 자신의 시를 빗는다. 또한 그가 추구했던 지고의 진리는 보편성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밀튼은 보편적 알레고리가 원래의 문맥을 훨씬 초월하는 이 이야기의 버전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성서적 뼈대를 따랐기 때문이다. 밀튼의 비교적 관점에 의거하건데, 이 근대의 기독교도 영국인이 그러한 사건들을 보편적 참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실낙원은 주로 아담과 이브와 관련하는데, 이들은 밀튼이 받아들인 성서적 신화에 의거하면 우리의 최초의 부모이다. 그렇다면 후기 다윈의 진화론적 지식을 갖고 사는 우리들은 왜 여전히 이 이야기에 매료가 되는가? 그 이유는 이 알레고리적으로 깔려있는 이야기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는 우리의 실질적 부모를 표상하며, 그들로부터 우리는 유래하고 있으며, 그들의 윤리적 선택으로부터 우리는 즐거워하거나 혹은 괴로워 하여 왔다. 더욱이 아담과 이브는 우리 자신(여성은 이브, 남성은 아담)을 표상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의미있는 상대방(여성은 아담, 남성은 이브)을 표상한다. 따라서, 이 가정적이며 개인적인 드라마는 다른 서사시적 이야기들 보다도 더 직접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버질이 디도와 아에네아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밀튼은 아담과 이브가 결혼을 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에덴동산에 교회는 없었다) 아리송하게 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심리학적 구성은 이러한 수준 이상이며, 아마도 더 깊을 것이다. 프로이드의 용어를 빌리면, 신은 엄격한 초자아(Superego)로, 악마는 저항하는 원아(Id)로 나타난다. 융의 개념으로 살펴본다면, 아담과 이브는 신화와 깊이심리학으로 알려진 남녀양성적(androgynous) 특징을 동등하게 창조하고 있다. 즉 여성에게는 자아와 아니무스(Animus), 남성에게는 아니마(Anima)와 자아를 창조하고 있다. 이 모두에서 우리는 밀튼이 기술하고 있는 관계는, 독신주의자나 동성연애자들을 제외하면, 보편적임을 주목하게 된다. 밀튼은 자신이 이 세계를 통해 어떤 열망하는 독자를 발견할 것임을 알 수 있었을까? 의심의 여지없이 그랬을 것이다. 밀튼은 보편성의 학도이자, 알레고리의 해석자이며 그리고 여러 원형들에 대한 실제적 알레고리주의자였다.
타소가 이 장르를 재정의하고 있듯이, 실낙원은 근본적으로 알레고리적이다. 그것의 “이념”은 원죄의 교리이며, 그것의 신학은 그러한 단초에서 몰락, 에덴으로부터 추방 그리고 이어지는 인간의 구원의 드라마로의 전개이다. 실낙원의 알레고리적 인물들은 상호침투적 단계로 존재하며, 독자로 하여금 밀튼의 신앙을 신뢰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론적으로 귀의를 하도록 하는 일종의 해석적 연루를 요구한다. 그만큼 명백하다. 밀튼의 새로운 주제로부터 요구되는 새로운 방식은 보다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밀튼이 호머, 버질 그리고 오비드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단테, 타소 그리고 스펜서와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밀튼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서사시를 쓰게 되었을 때에는 이를 홀로 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점에서, 전례없는 형식의 복낙원은 실낙원보다도 더 위대한 도전을 설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타소는 로망스의 지위를 올려놓은 것으로 우리는 기억한다. 어떤 의미에서 아곤(agon), 파토스(pathos) 그리고 아나뇨리시스(anagnorisis)의 패턴은 밀튼 자신이 제시한 고전적 서사시와 비극의 패턴들 보다도 더 실낙원과 관련하고 있다. 밀튼의 걸작은 또한 주인공이 사랑의 향연을 베풀고 이어서 몰락하는 sacra rappresentazione라는 이탈리아 전통에 기반을 둔 연극적 서사시이기도 하다. 가면극, 야외극 그리고 예언적 모습은 모두가 알레고리적 형식을 띠며, 서사시나 로망스 만큼 중요한 밀튼의 작품의 유형들이 된다.
밀튼이 성서적 주제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어쨌든 그 자신의 개인적 해법을 언급하는 것이다. 리란드 라이켄(Leland Ryken)은 “영웅적 이야기를 쓰는 기독교도 필자들은 여러 세기동안 영웅의 신학적이고 문학적 전통을 융화시키는데 고심하였음”을 주목한다. 그 예로 타소의 경우 “성전”(holy war), 스펜서의 경우 “로망스 알레고리”, 밀튼과 같은 시대 사람들의 성서적 서사시의 경우와 같은 “신시”(divine poetry)를 들 수 있다. 라이켄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경 그 자체는 일종의 서사시로 간주되며 그것의 나레이티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알레고리적 전통을 위해서 또다른 중요한 모델을 제공한다. 더나아가서, “창세기, 출애굽기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서사시에서,” “밀튼은 가정적 가치를 영웅적 가치로, 인간적 영화의 서사시적 모티프를 신의 강점과 인간의 약점으로, 그리고 일부 공통적 서사시의 소재의 물리적 버전들을 정신적인 것으로의 대체를 위해 제각각 어떤 패턴을 발견하였다”라고 라이켄은 주장한다. 이 탁월한 학자는 이안 와트의 실낙원을 “결혼생활의 가장 위대하고 사실상 유일한 서사시”라고 규정한 것을 인용하게 된다. 세르반테스와 마찬가지로, 밀튼은 두개의 시대에 걸친 인물로서, 그의 앞시대에 벌어진 모든 것을 열심히 수집하고, 동일한 노력으로 이후에 다가오게 될 길을 준비하였다.
그렇다면, 밀튼의 시도는 어떻게 서사시에 관한 우리의 정의에 부합하는가? 스펜서의 작품 보다 더 근본적으로 신화적이며 보다 더 확장적 의미에서 신학적인 밀튼의 작품은 또한 그 이전의 어떤 모델 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밀튼의 시도는 이미 관찰된 특징들, 즉 그것의 알레고리적 에피소드들이 관계성과 부조화의 원리를 준수하고, 그것의 거대하게 추상적인 담론은 그것의 단순한 스토리로부터 어떤 알레고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마찬가지로 그것의 나레이터는 그의 유사한 요소들과 그의 환상적 요소들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며, 그것은 심리학적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이라는 것에 더하여 많은 알레고리적 국면들을 갖고 있다. 간략히 말해서, 단체와 스펜서의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실낙원은 실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은 영국의 독자들이 블레이크, 워즈워드 그리고 바이런이 밀튼이 고안한 것의 의미를 발전시킬 때까지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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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는 추락한 세계, 즉 플라톤이 말한 동굴거주자의 세계에 속한다. 알레고리는 자체적인 마음의 창조이며, 선악의 구별이 없는 세계에서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비평가로서 우리는 정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비평은 철학의 한 갈래이며, 철학은 최소한 서구적 갈래에서는 정의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정의는 문학의 핵심에 관하여, 특히 정의되는 영역이 알레고리와 서사시일 경우 정의의 올가미에 묶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문학에도, 철학에도 심지어는 비평에도 이롭게 되지 못한다. 바이런은 이 형식에 관한 맥카프리의 정의에 따르면, 신구 양자의 의미에서 알레고리주의자이다. 이론가로서 타소만큼이나 화려한 비평가로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 그는 심지어는 밀튼보다도 더 창의적인 실천가이다. 아마도 그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단지 16개를 넘어서서 자신이 계획했던 100개의 시편을 쓰기위해 살았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대혁명을 목격하기 위해 후안이 파리를 방문한 이후에, 만일 그가 사리가 있었다면, 보다 더 넓은 미국이나, 인도 혹은 중국으로의 여행에 바이런을 대동하지 않았는가하고 우리는 추측한다. 어떤 의미에서, 휘트만과 파운드는 이러한 약속을 실현한다. 또다른 의미에서, 이들은 여러 책속에 스스로를 숨기고 있다. 왜냐하면, 맥카프리가 경험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칸트적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작가는 자신의 인생, 자신의 작업에서 끝이 없는 계획을 갖고 있지만, 바이런은 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는 호머에서 밀튼에 이르기까지의 서사시의 특징을 종결짓는다. 여기에서 그의 선구자들로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비드와 아리오스토이다. 따라서, 바이런은 파운드가 학교에서 배우든 안배우든 읽혀져야만 하는 작가들로 분류한 작가들 군에 속한다. 젊은 비평가인 바이런은 자신이 호머, 버질 그리고 단테(그는 자신의 “지옥의 파노라마적 조망”을 계획한다)의 계열에 속하는지 혹은 그가 보다 진실하다고 여겼던 밀튼, 드라이덴 그리고 포프의 계열에 속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 밀튼을 그는 자유의 사도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안에서 아담에 대한 그의 재해석에서 그도 역시 이 시인의 중요성을 이해하였음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그는 그 자신이 호머라기 보다는 오딧세우스이다. 왜냐하면, 바이런은 주안을 오딧세우스와 동등한 존재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자전적이며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서사적이며 신화적이다(그가 돈 주안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밀튼과 마찬가지로, 바이런은 창세기에 심취한 학도이다. 창세기는 헤시오드,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오비드와 함께, “태초와 함께 시작한”(말하자면, 주안의 탄생과 함께) 그의 결정에 영향을 준다. 이는 해방이자 동시에 빈곤이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사건 중심으로(in medias res) 시작하는 이 시인에게 다가올 수 있는 관점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삼각관계를 한 때 행했던 바이런은 이를 계속 반복한다. 바이런의 독자는 그가 자신의 이복 여동생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행하지 않았는지 의심하게 된다(주안의 Catherine the Great와의 조우를 참조해 보라). 아마도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바이런의 무능력은 그와같은 끔찍한 사건으로 귀결되게 한다. 어쨌든, 그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게 된다. 돈 주안과 같은 끝이 없는 작품에서, 모든 것은 변화될 수 있거나 혹은 어떤 것도 변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서사시의 근본적 술어들은 결코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돈 주안의 신화는 그 자체가 반복적이며 끝이 없다. 신학은 이를 종결지었지만, 바이런은 이 스토리에 대한 자신의 버전을 살아서 끝맺지 않았다. 돈 주안에서 역사는 현재이다. 하지만 현재의 역사는 용어에 있어서 모순이므로, 이 소설이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그 자체로는 서사시의 부적절한 기반인 경험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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