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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 엘리옷 그리고 파운드의 아시아적 영향
거의 2천년 동안, 유럽의 문화는 두개의 전통 즉 성서적인 것(the Biblical)과 고전적인 것(the classical)에 지배되었다. 여기에 명시적으로든 혹은 은밀하게든 이 두개의 변두리에 제3의 요소를 마지못해서라도 깃들게 하였다. 때로는, 이 제3의 전통은 이집트적인 것(아이시스는 마르세이유에서 북부 트리에까지, 기원 후 800년까지 숭배된다)의 경우에서처럼 이국적인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그것은 신플라톤적인 것의 경우에서처럼 주요 전통들을 융합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그것은 장미십자회원(the Rosicrucian)의 경우처럼 전통중 하나를 밀교적 요소와 결합하기도 하였다. 최근에 와서, 제3의 전통은 우리가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등으로 명명하는 외관상 끝없는 일연의 사조에서 독특함과 포괄성을 고취시켜 왔다.
이들 사조들은 종종 세속적인 것으로 논의되지만, 사실상은 종교적이다. 18세기의 기독교의 폐지와 19세기의 고전학습의 쇠퇴는 일단은 유대교의 소멸을 그 다음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의 소멸을 초래한다. 하지만 이들을 대체할 실질적인 신성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대의 사조들은 스스로 수세기 이상을 제도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신을 찾기 위한 여러 가지 탐험은 계속되었으며, 동양문화에 대한 탐험은 지난 두세기 동안에 그러한 여정에서 가장 장수했던 시도로 나타났다. 만일 18세기가 이 새로운 제3의 전통의 발아기로 간주되고, 19세기가 싹을 트는 단계로 간주된다면, 20세기는 이의 번성기로 간주될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이러한 3개의 국면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예를 들면 윌리엄 존스 경과 같은 초기 동양주의자들의 초기 단계적 작품과, 에머슨, 소로 그리고 휘트만 작품에서의 동양적인 것의 개척, 그리고 그 다음의 독자적 동양학들이 그렇다. 20세기 시의 여러 연구들은 보다 세밀하게 그의 지속적인 영향관계를 다루어 왔다. 가령 20세기 중반의 불교적 탐구의 지속적인 물결의 시작된 것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의 영미계열의 시에서 아시아적 요소는 그렇게 세심하게 고려되지는 않았었다. 에즈라 파운드의 경우는 특별한 주목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일반적 사조의 흐름과 관련해서 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사조로부터 예외적인 인물로서 간주되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코스모폴리턴적 시인들로서 이츠, 엘리옷 그리고 파운드를 논의할 것이다. 이들에게서 의식적이고 세심한 동양적인 것의 과정이 시도되었다. 그 다음에 필자는 보다 지역적인 시인인 스티븐스, 윌리엄스 그리고 프로스트를 논의할 것이다. 이들에게서 동양적인 것의 과정은 비교적 직관적이고 임의적이다. 논의되는 시인들의 수를 이들로 제한함과 더불어, 필자는 아시아적 요소로서 다음 4개의 것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것은 베다적인 것(the Vedantic), 불교적인 것, 유교적인 것 그리고 도가적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츠, 파운드 그리고 엘리옷은 서로 밀접하게 연상되지만, 이들 사이에 세 개의 전통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엘리엇은 성서적인 것(기독교), 파운드는 고전적인 것, 그리고 이츠는 이 둘의 전통 사이에서의 방황과 제3의 전통인 주술적인 것에 대한 그 자신의 초기 수용에 의해 제3의 것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이들 시인 모두는 이 세 개의 전통을 종합하는데 있어서 서로 각각 경쟁한다. 우리는 사실상 이 문화적 전통들을 판단하는 과정이 그들의 운문과 산문 작품의 통합적 주제를 형성한다라는 사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을 계승함에 있어서의 후세에게 그러한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압도적인 시적 탁월함 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판단의 진실성일 수도 있다.
1895년 윌리암 버틀러 이츠는 30의 나이로 자신의 시선집을 출간하고 이 시집의 얇지만 주의깊게 노심초사한 내용들을 두개의 부문, 즉 “교차로”(Crossways)와 “장미”로 나눈다. 이에 의해 이츠는 장미십자회원의 이미지에서 발견되는 장미가 첨가된 십자가를 시사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츠는 모더니스트들의 혼합주의와 자신의 특징적인 유유부단의 모델을 수립했다. 이츠의 두 번째 타이틀인 장미는 무엇보다도 원시적 아일랜드(짙은 로잘린)를, 그의 첫 번째 타이틀에서의 십자가는 근대의 카톨릭 율법을 나타내고 있다. 이츠의 여러 전통들 중 선택의 어려움은 후기의 시인 “유유부단”(Vacillation)에서 가장 많이 표현되고 있다. 이 시에서 수사학적 질문인 “호머가 원죄 이외의 다른 주제를 가진 적이 있는가?”는 종합에 대한 이츠의 능력 뿐만 아니라, 두개의 주요 전통 사이에서 어떤 선택에 직면했을 때의 자신의 유유부단함을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유유부단함에 불만을 가진 이츠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3의 전통을 추구한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첫 번재는 신비적인 것과 원시적인 것에서, 두 번째는 이국적인 것에서이다. 어떤 특정의 전통에 결코 의거하지 않았던 이츠는 말하자면 그가 드럼클리프 교회마당에 마지막으로 차지한,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무덤의 영웅적 비문을 제공하고 죽게된다.
이 또다른 밀튼인 이츠가 이 2개의 주요한 전통의 가치를 요약했던 것은 보수적인 노년기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이 영웅적 주제는 이츠의 작품을 오딧세이의 작품에 모델을 두고 있는 가장 초기의 “오이신의 방랑”(1889)으로부터 아일랜드의 아킬레스인 쿠쿨란에 대한 새로운 관심, 그리고 명백히 호머적 내용의 시, 그리고 그의 말년의 금욕주의적 정신에 이르기까지 스며들고 있다. 자신의 가장 초기의 의도에 관해 말함에 있어서, 이츠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무지가 허용한다면, 나는 호머로 돌아가고 싶었고, 호머와 한솥밥을 먹은 자들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에서 마지막 구절은 고전기의 아테네의 드라마 작가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츠의 작품에서 기독교적 요소는 가장 특징적으로 제2의 전통과 융합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주제와 결합된 작품인 연옥(Purgatory)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적 요소는 또한 인생과 작품에서의 순수한 표현을 두드러지게 수용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의 딸을 동정녀의 어머니로 명명하고 그의 아들을 현세의 악과 싸우는 지상의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명명하는데서 가장 명백할 것이다. 더욱이 양자의 탄생은 시적 기도의 형식으로 축하를 받는다.
필자는 지금까지 밀튼을 언급하여 왔다. 하지만 이츠가 그의 특징인 유유부단함이 영향을 받은 것은 세익스피어였으며, 보다 정확하게는 세익스피어의 인물들 중 한 사람인 햄릿이었다. 이 아일랜드의 시인은 세익스피어를 다양성과 복합성의 작가라고 칭송을 한다. 신기하게도 햄릿은 부처와의 병치 속에 두 번 등장한다. 1914년 최초로 출간된 자서전의 한 섹션에서 이츠는 자신의 벽난로에 관해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적 스승인 윌리엄 모리스를 묘사한다:
그것은 ‘어떤 언덕과 같이 넓고 황량한 . . .우수꽝스런 상상’이 절반 정도가 부처의 꼼짝하지 않고 있는 명상을 연상하는 결연한 유럽인의 이미지이며, 우리 시대의 유명한 햄릿 때문에 마음의 눈을 채울 수밖에 없는 배고픈 명상의 흔들리고, 가냘픈 이미지와 공통의 어떤 경향도 갖지 않는다.
우리는 “조각상”에서 후일 부처의 불완전한 대안으로서 회상되는 햄릿을 기독교에 의해 나약하게 된 영웅의 이미지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극적 장면”의 제4편 베일의 전율에서, 이츠는 그가 알고 있었던 어떤 기독교적 시인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 “왜 오늘날 이들 기이한 영혼들이 도처에서 탄생하고 있는가? 이들은 역사에 의해 형성된 기독교가 만족할 수 없는 정신들이다.”) 그러므로 이츠에게 있어서 부처는 그리스도의 대안으로 재현된다. 즉 부처는 환생을 통해 영원한 것으로 간주되며 이 순간에 모리스의 명상적 얼굴을 배회하는 일종의 유령으로 상상되는 자신의 고대 요정의 형상에 대한 연상에 의해 강화된 존재가 된다.
이츠는, 고통받는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대한 이 동방의 대안을 동일시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그것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이츠가 한 친구에게 자신의 밀교(Esoteric Buddhism)와 르낭의 그리스도의 일생의 사본을 빌려준 이후, 이츠(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 친구는 스스로 불제자(chela)로서 신지학 사회에 뛰어들었다. 이츠는 그 친구가 “지금은 내가 열정이 없어서 초조”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츠 자신은 아마도 자신의 아버지의 회의론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 책들의 중간의 어딘가에 머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경우에, 그리고 종종 비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츠의 유유부단함은 어떤 포괄적인 관련범위의 형식을 취한다. “1909년 쓰여진 일기로부터의 발췌”인 소외의 한 문장에서, 이 시인은 자신이 자전의 새롭게 고안된 방식을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이들 기록들이 내게 자연스럽고 유용되기 위해, 나는 다른 기록 보다도 단 한개의 기록을 명심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나 자신이 문학에 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기록은 일시적 생각으로 다가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도, 부처도 소크라테스도 책을 쓴 적이 없다. 왜냐하면 책을 쓴다는 것은 인생을 어떤 논리적 과정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기독교 순교자들 사이의 연대기적 순서로부터 벗어난 부처는 사실상 이 셋 중 우리가 그의 말을 인용하지 않은 유일한 자이다. 서구적 논리의 아버지 그리고 길을 제시하는 말씀을 했던 신과 비교했을 때, 부처는 이츠가 설명하고자 했던 것의 유일하게 타당한 예를 재현하였다고 얘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잔티움”에서 표현된 이츠의 욕망에 있어서와 같이, “수렁 혹은 생명으로부터의 모든 번민”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때때로 어떤 불교적 느낌이 두드러지기도 하는데, 이는 불교적 교리에서 보게 되는 번뇌의 세계(samsara)로부터 해방(moksha)과 동일한 것이다. 또 다른 불교전통에 따라서, 전형적으로 궁극적 평화(nirvana)를 이 고통의 세계와 동일시한 전통을 통해, 이츠는 예를들면 “서커스 동물들의 유기”란 작품에서 그의 궁극적 지혜를 “마음의 너저분한 넝마가게”의 수용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작품에서 부처의 중요성에 관한 보다 명시적 예는 “조각상”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츠는 원칙적으로 근대의 아일랜드와 고대 그리스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그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 없는 3번째의 절에서, 불교적 시각을 용인한 자신의 방식을 벗어나서, 중세 기독교에 관한 자신의 버전을 보다 더 선호하게 된다. 거의 역사적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두 번째 절에서, 이츠는 “모든 아시아적 어렴풋한 공간”를 거부하고 피디아스의 그리스를 껴안게 된다. 이는 이츠 자신의 초기의 힌두교리에 대한 탐닉의 거부로 해석될 수도 있는 제스처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이츠는 노년에 인도 철학의 원천으로 되돌아 왔으며, 우파니샤드의 선집을 번역하였다. 우리는 이 아일랜드의 시인이 어떻게 해서 부처에 대한 관심 이전에 베다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신의 노래(Bhagavad Gita)는 그로부터 복음서가 만들어진 ‘시나리오’인가?”라고 이츠는 1909년의 일기에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힌두사상은 기독교 보다 앞서있지만, 이츠는 자신의 “어렴풋한 명상”은 20세의 나이에 모히니 차터제(Mohini Chatterjee)가 더블린을 방문했을 때 맞추쳤던 힌두사상에서의 명상 보다 더 앞서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 구성된 블라바츠키 로지(Blavatsky Lodge)의 회원으로서, 이츠 그 자신은 이를 기획하는데 앞장 섰다. “우리는 한 브라만 철학자를 런던에서 더블린에 오도록 설득하였다,”라고 이츠는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그것은 나의 어렴풋한 명상을 확인해주었던, 논리적이며 자유로운 철학과의 최초의 대면이었다.” 이츠가 그리스의 사상의 철학적 특징을 성서적 신의 무한성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그러한 해결을 오로지 이국적 전통의 영역 내에서만 발견하였을 때, 어떤 종합적 정신이 다시금 작용하게 된다.
이 아일랜드 시인의 힌두사상에 대한 관심을 최초로 자극하였던 자가 누구인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에게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람으로 그의 철학적 스승인 블라바츠키 부인을 꼽아야만 할 것이다. 블라바츠키 부인의 백과사전적 작업은 베다사상으로 가득차 있다. 자서전은 단지 간접적으로만 여러 가지 그와같은 자극들을 넌지시 비치고 있다. “때로는 그가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라고 이츠는 그의 친구인 시인 A. E. 러셀에 관해 말한다.
초기에 그가 에머슨과 발트 휘트만의 시를 접하지 못했다면 . . . 그리고 우파니샤드의 번역서를 접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머슨이나 휘트먼의 유용한 등불 보다 타들어가는 인도 전통을 공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초기의 이츠는 “내가 10대에 슬리고에서 형성된, 이니스프리(Innisfree)를 쓴 쏘로우(Thoreau)를 모방하면서 살고 싶은 욕망”에 대해 말하였다. 이 미국의 자연주의자는 스스로 힌두의 금욕주의에 고취되었다. 두명의 다른 미국인 선배들의 이름에 대한 강조는 이츠가 인도전통의 전파를 위해서 또한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최초의 회상을 기록한 자서전의 첫 페이지는 이 시인의 초기 발전에 영향을 준 자신의 외할머니인 윌리엄 폴렉스펜의 집의 식당에 관한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 문장은 “그가 죽은 이후 내게 귀속된 그의 자녀들의 세례를 위한 요르단의 물항아라 그리고 화선지에 그린 중국그림들 그리고 인도에서 온 상아 지팡이”를 열거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이 3개의 전통과 3개의 전통의 탐구 중에, 우리는 이츠의 최초 중국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대리적 엿보기를 하게 된다.
철학적이라기 보다는 분위기적인 인도적 주제들에 관한 3개의 초기시와는 달리(“자신과 영혼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이후의 “모히니 차테르제”도 이츠의 원숙한 사상에 핵심적인 환생의 이념을 매우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후기의 동양적 시, 특히 중국적 주제의 시들은 이츠의 가장 숙고적 명상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중국의 직접적 인상을 수집했던 오덴과는 달리, 이츠는 상상으로만 여행을 하였다. 또한 이 시인의 힌두철학의 관심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와는 달리, 아마도 이츠가 에즈라 파운드와 함께 가졌던 친분에 의해 고취되었던 한 다소 특징적이지 못한 유교적 비문이 1914년의 콜렉션인 책임(Responsibilities)을 꾸며주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츠의 중국은 현저히 도가적이거나 혹은 보다 일반적이거나 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의미하는 것은 이츠에게는 중국이 서양의 철학적 관점이나 문명에 대한 대안으로서 넓게 인식되고 표상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구문명의 사망은 이들 여러 후기 시의 주요한 주제이며, 이들 시들은 동양에서 단서를 찾을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피스 라줄리”는 여기에서 주된 텍스트이다. 종종 주목되어 왔듯이, 이츠의 논의가 지향하는 핵심적 용어는 “비극”과 “환희”(gaiety)이다. 분명하게 보여지지 않았던 것은 이 마지막 책을 여는 시들의 전체는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편성되는 방식이다. 해리 클립튼이 그에게 선사한 라피스 라줄리에서의 조각술에 기반을 둔 이 유명한 작품에서, 이츠는 제2차세계대전 전날 서구의 쇠퇴에 관해 명상하면서, “모든 사물은 쇠퇴하고 다시 건설된다”고 하면서 서구의 몰락뿐만 아니라 그의 재건을 예언한다. 우리가 자연히 묻게 되는 질문은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인가이다. 그에 대해 다음의 문장은 단서를 부여한다. “또한 이를 건설하는 자들은 게이이다.” 이츠에게 있어서, “게이”란 전통을 이탈한 자들이 아니라, 전통을 통합하고 그것을 초월한 철학적 성향의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한 사람이 “중국인”(Chinamen)이다. 이 시의 말미에서 중국인은 언덕을 올라와서 “이 비극적 광경”을 회상하고, 시의 마지막 단어에서 그 중국인의 시각이 “게이”로 기술된다. 그러한 점에서, 일종의 회귀적 움직임에 의해, 리어와 햄릿과 같은 철학적으로 우뚝선 인물들 역시 “게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용어로 기술되는데. 이들은 이제 이 범주에 포함되게 된다. 이 시의 독자들은 때때로 (어쨋든 한 오래된 돌맹이에 새겨진) 이 중국적 인물들을 과거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는 아마도 이들 인물들의 시각은 “과거적”인 것으로 이츠가 기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츠에게 있어서 이들 인물들은 현재에도 생생히 살아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구절 전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두명의 중국인 그리고 그들 뒤에 제3의 중국인이,
라피스 라줄리에 새겨진다,
그들 위에 장수의 상징인,
긴 다리의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제3의 사람은 분명 시중으로서,
어떤 악기를 갖고 있다.
분명 자두 혹은 벚꽃 가지가
저 작은 반쯤 짓다만 집을 달콤하게 하지만
돌의 빛바램,
우발적 금 혹은 패임이,
물줄기 혹은 눈사태처럼
혹은 아직도 눈이오고 있는 곳의 높은 언덕처럼 보인다
이들 중국인들은 계속 오르고, 나는
이들이 그곳에 앉아 있음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곳, 그들이 응시하는 모든 비극적 장면에.
누군가 슬픈 멜로디를 요구한다;
능숙한 손가락이 연주를 시작한다.
많은 주름살 가운데의 그들의 눈, 그들의 눈,
그들의 오래된, 반짝이는 눈들은 게이이다.
이 귀절에서 핵심적 전환은 끝에서 7번째 문장에서 발생한다. 여기에서 이 시인은 그들 앞에 표상된 광경으로부터 그에 대한 자기자신의 외연으로 그의 관심을 이동한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여행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하고, 반쯤 짓다만 집에 도달하게 하고, 그리고 그 자신이 일찍이 추측하였던 “이 비극적 광경”을 응시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은 이츠이기 때문이다. 음악이 요구되고, 그리고, 어떤 의미있는 구절에서, “손가락들이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미래에 발생하며, 어떤 고대문명의 업적이 이츠의 공시적, 융합적 상상력에 의해 희망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츠의 동양주의는 여기에서 신비주의라는 서구적 고정관념에도 부응하지 않는다. 고독한 햄릿과 리어와 대조적으로, 시중과 함게 이들 도가사상가들은 사교적 파티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는 어떤 고독한 은둔이 아니다. 이 시의 처음 반절을 통해 표상된 문명의 파괴와 대조적으로, 이들의 활동은 그의 영속성을 표상한다. “라피스 라줄리”에서 역사적 진보의 의미는 흥미롭게도 이츠의 다른 가장 중요한 “중국적” 구절에서, 즉 “천구백십구”에서 그의 또다른 한쪽을 발견하게 된다:
로이 풀러의 중국인 무희들이
빛나는 거미줄, 유동적 천 리본에 얽힐 때,
하늘로부터 한 용이 무희들 사이에 떨어져서,
무희들을 동여매거나
혹은 무희들을 포효하는 길로 몰아세웠다;
그리하여 플라톤 년은
이 새로운 옳고 그름을 빠져나오고,
대신에 과거를 선회한다. . .
이츠의 용의 표상은 파괴적인 서구를 회복적인 중국적 힘과 결합한다. 더욱이, 마지막 3개의 구절에서는 이중의 움직임이 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옳음과 이 새로운 그름은 양자가 이들의 보다 오래된 짝에 의해 대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라피스 라줄리”는 마지막 시(Last Poems)에서의 문맥을 검토함에 의해 이해될 수 있음을 시사하여 왔다. 이 책에서 이츠는 “소용돌이”(The Gyres)란 시로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이 시가 들어가며, 그 뒤에는 홋쿠(hokku)의 산문번역으로부터 완성된 “일본으로부터 모방”이란 제목의 시가 등장한다. 이츠가 자신의 시대의 이중적 운동을 도식화한 인물의 마지막 처리인 “소용돌이”의 첫 구절은 이 시인의 관점을 “라피스 라줄리”에서의 중국인의 관점과 동일시하고 있다:
소용돌이여! 소용돌이여! 오랜 바위얼굴이여, 앞을 봐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음으로부터 시들고, 가치는 가치로부터 시들기 때문에,
너무나 오래 생각되었던 것들은 더 이상 생각될 수 없으며,
또한 고대의 윤곽은 지워진다.
비합리적 피의 흐름은 지구를 얼룩지게 하며;
엠페도클레스는 모든 것을 흩뜨리고;
헥터는 죽고 트로이에는 등불하나가 있다;
응시하는 우리는 비극적 즐거움에 냉소한다.
“비극”의 면전에서 “반짝이는 눈,” “게이”에 반영된 이 중국인들의 즐거움은 “비극적 즐거움”을 냉소하는 사람들의 기분과 유사하다. 그러한 “즐거움”은 이츠가 여기에서의 용법과 “라피스 라줄리”(“70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즐거워서 춤을 춘적이 결코 없다”라고 화자는 말한다)에 이어지는 시에서의 용법과의 대조에 의해 명확히 한 인습적 의미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츠가 자신의 관점으로 삼은 옛날 중국의 관점에서 즐거움(왜냐하면 이츠 자신은 이제 “항상 즐거운 이들 시인들”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은 희극적이지도 쾌활하지도 않고 오히려 매우 체념적이다.
하지만, 이츠의 계속적인 논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의 논의를 동양적이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이츠의 마지막 견해를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일본적인 것으로부터 모방”에 바로 뒤이은 “멋진 무희”라는 제목의 시에서, 자신의 춤에 미친 한 외로운 소녀가 간접적이기는 하나, 중국인의 즐거움은 서구인에게는 자신의 문화적 맥락 내에서는 타당성 있는 해결책이 아님을 시사한다. 앞서 인용한 “소용돌이”에서의 새로운 것은 과거의 것을 대체한다라는 문장들은 과거의 것이 새로운 것을 대체하여 왔다고 한 “천구백십구”에서 언급된 역사의 운동과 모순된다. 이츠의 완벽한 순회관은 모든 사물의 지속적인 반전을 내포한다. 어쨌든, 이 마지막 두개의 예들은 이츠의 동양에 대한 애정과 그가 말한 문명이 취하는 새로운 진로에 대한 의미와 관련하여 주목되어져야 한다.
“초자연의 노래”의 12번째에서, 이츠는 “다양한 환상에 의해. . . .어떤 법칙 하에 도래된 것으로의” 문명을 표상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의 생활은 사고이며,” 인간은 “자신이 실체의 황폐에 이르를 수도 있는” 역사를 “탐구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이어서 다음의 구절들이 등장한다:
이집트와 그리스여, 안녕, 그리고 로마여 안녕!
메루산 혹은 에베레스트산의 은자들은
쌓인 눈 밑의 동굴 속에 밤을 지새며
낮이 밤을 가져가고, 새벽이 오기 전에
그의 영광과 그의 기념비들이 사라지게 됨을. . .
. . . . . . . . . . . . . . . . 안다
이러한 순환의 보다 균형잡히고 완벽한 버전으로서, 이 환상적 영감은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하여 왔던 명시적인 3가지 전통의 영역에서 어쨌든 분명하게 서구를 버린다. 다시 한번 이 시인은 산중턱으로부터 역사의 비극을 바라보는 동양인의 관점을 공감적 술어로 표현한다.
1939년은 “라피스 라줄리”가 나온 다음해이자, 이츠의 인생의 마지막 해로서, 이츠의 사상은 명백하게 동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츠는 서구문명의 몰락의 주제를 계속해서 고심한다(그는 자신의 마지막 시인 “Upon Ben Bulben"에서 “소용돌이는 계속 진행한다”라고 말한다; “위대한 꿈이 사라질 때. . .혼돈은 우리의 생각을 엄습한다.” 또한 이 해의 “긴 다리의 파리”는 “문명이 사라질 수 없는 한줌의 희망을 표현한다. 그러한 목표로, 이 시인은 미켈란젤로의 아담과 이브의 프레스코화를 간직한 교회당의 문을 닫을 것을 권고하고, 이제 위대하게 사라진 트로이의 헬렌의 영광을 회상하고자 한다면 청자는 “부드럽게 움직일 것”을 시사한다. 헬렌과 미켈란젤로를 위한 바리에이션으로 반복되는 후렴은 다음과 같이 간주되는 “우리의 주인 시저”에게 주어진 첫 번째의 절에 존재한다:
지도가 펼쳐지는
텐트 속에,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머리 맡에 손을 얹는다.
떠다니는 긴 다리의 파리처럼
그의 마음은 고요함을 찾는다.
이 시의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이 연은 순수하게 서구적 술어로 읽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모더니스트 시인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들 작품에 “무”라는 술어의 사용은 종종 많은 서구인들이 동양사상의 특징으로 간주하는 무지(우지, 無知)와 무위(우웨이 無爲) 철학의 시적 함축을 재현한다. 여기에서 고요함을 향해 움직이는 마음은 동시에 불교적 원리인 (시정?)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동양적 대안은 내가 지금까지 논의한 다른 예에서 만큼 그렇게 분명하게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츠는 우리의 시저가 트로이의 헬렌과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실제를 혁신하여야만 함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혹은 보다 더 일반화하면, 이 시인은 다시금 고전적이고 성서적 신화를 배척하고 있으며, 이를 문명의 지속을 위해 동양적인 태도로 대체하고 있다.
우리가 다음으로 T.S. 엘리엇으로 향한다면, 그것은 그의 선배인 에즈라 파운드에 전거를 주는 일이 없이, 점차적으로 자신의 작품의 동양화에 헌신하여던 세 시인들을 순서 대로 고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츠가 초기 교육을 받았던 곳으로 동양적인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스튜디오와는 너무나 달리, 엘리엇이 학부생으로 다녔고, 다시 서구 관념철학과 함께 산스크리스트와 팔리어를 배우기 위해 되돌아 왔던 20세기 초의 하바드 대학교는 비교사상과 동양학의 온상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이 젊은 시인은 자신의 초기시에서 동양적 관련을 제외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하바드의 충격은 엘리엇의 중기와 후기의 주요 시에서 현저하게 느껴진다.
항상 자신의 소리로 자신의 원천들을 흡수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들을 투사하고 비판하는 이츠와는 달리,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파운드가 이미 적나라한 인용으로 채택하였던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엘리엇은 이를 대부분의 자신의 동방적 재료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그리고 병치와 암시의 과정을 통해, 이들을 자신의 서구적 재료들로 융화시킨다. 이들 중 어떤 것은 오리지날로 제공하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번역된 상태로 제공한다. 이것이 적어도 엘리엇이 3장 말미에서 어거스틴의 고백과 부처의 오리지널 설교에 기반을 둔 것으로 제목을 취한 부처의 불의 설교를 다루는 방식이다. 이 마지막 포인트는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처음의 3장의 제목들은 모두가 인용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첫장은 영국국교의 서비스에서 “사자의 매장”을, 두 번째 장은, 한 세속문학작품으로부터 “체스게임”이 그것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제목인 “수사”와 “천둥이 한 말”은 다른 제목들을 인용하지는 않지만, 엘리엇의 주석들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듯이, 주술적인 타로카드와 브리하다라니아카 우파니샤드에 대한 참고는 하고 있다. 주석 218줄은 “시의 실체”는 “티레시아스가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엘리엇의 의도는 성서적인 것, 고전적인 것, 주술적인 것, 불교적인 것과 힌두교적인 것의 전통들을 껴안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이츠와 파운드의 동시대적 작품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이 시에 중국적 요소가 없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것이다.
이츠의 풍부하고, 완화되고, 철학적인 담론과는 대조적으로, 엘리엇이 소위 “동양과 서양의 금욕주의”의 “병치”라고 하는 다음의 여분의 문장은 무상하고 결론이 없는 것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카르타고에 나는 왔다
불태움 불태움 불태움 불태움
오 신이시여 당신은 나를 벌하시나이까
오 신이시여 당신은 나를 가로채시나이까
불태움
하지만 엘리엇 작품의 “시”는 원료와 그의 병치로서 뿐만 아니라 음률에 대한 비판적 소리의 처리에 의해 구성된다. 엘리엇의 문장 그 자체는 또한 어거스틴과 불교적 전통에서의 전거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중재한다. 왜냐하면 첫 문장과 세 번째의 문장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네 번째 문장) 어거스틴을 인용하지만, 이들 문장은 단지 번역적으로 그리고 가장 단편적 방식에서만 그럴 뿐이다. 나머지 두 문장은 한개의 반복된는 단어와 함께 단지 불의 설교를 언급하고 있다. 엘리엇이 언급하고 있는 헨리 클라크 워런의 번역에서 이 텍스트의 내용은 이 시인의 예술성의 또다른 국면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지각할 때, 오 신부들이여, 이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도는 눈에 거슬리는 것을 이해하고, 추한 형상을 이해하고, 추한 광경을 이해하고, 눈에 수렴된 추한 인상들을 이해한다. . . .그리고 이 추함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는 열정을 잃게 되고, 또한 열정이 상실에 의해 그는 자유롭게 되며, 그리고 그가 자유로울 때, 그는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재탄생이 고갈되었다는 사실, 그가 성스럽게 살았다는 사실, 그가 응당 하여야 할 것을 행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이는 엘리엇이 (“하바드 동양 시리즈”에서 완성된) 그리고 워런씨와 부처 양자에 관한 그 출처에 관한 언급과 자신의 찬사 양자에서 솔직하게 우리의 주목을 끌게하고 있다. 따라서 솔직히, 우리는 이를 이 시의 일부로 간주할 수도 있다. 특히 부처를 언급하는 섹션의 제목과 주석 그 자체와는 별도로 이 텍스트에서 다른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인용하여 왔던 문장들과 관련하여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가? 그것이 제3장 전체와 관련을 갖고 있지만, 보다 특정적으로는 그것은 우리가 인용하였던 문장에 직접적으로 선행하는 문장, 즉 (단지 한 근대의 성적 만남의 이미지를 부과하기 위해) 엘리자베스와 레체스터를 도입한 근대의 템즈강을 기술하는 문장, 그리고 또다른 소리로 끝을 맺는 문장과 관련을 갖고 있다. 그것은 엘리엇이 그 시의 일부를 ㎢마르가트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목소리는 이 시인 자신의 목소리와 병합한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에서 “이 사도가 눈에 비친 인상들을 혐오하고” “그가 열정을 잃게 되는” 문장의 진행과 평행한 시의 진행을 갖게 된다 : (“이 사건 이후” 이 시의 유혹자는 “‘어떤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며 눈물을 흘린다). 2개의 임시적인 문장에 이어서, 엘리엇은 어거스틴을 회상하며, “성스런 삶을 살았으며,” “해야 할 것을 당연히 행했으며,”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므르지 않는” 또다른 인물을 재현한다. 그에 의해 어거스틴은 부처와 병합될 뿐만 아니라 (이 시인은 불의 설교를 암시하는 문장 사이사이로 어거스틴을 등장시키거나 어거스틴을 암시하며 불의 설교를 등장시키거나 한다), 양자는 엘리엇 풍의 목소리로 병합된다. 우리는 이제 엘리엇의 주석을 엘리엇이 어거스틴에서 부처를 발견하고 부처에서 어거스틴을 발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앞서의 여러 문장에 나오는 마르가테에서의 엘리엇 풍의 문체는 “나는 무를 무로 연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문장을 쓸 당시의 엘리엇의 초조하고 닳은 마음 상태와, 시인으로서, 그가 어거스틴과 부처의 극기적 행위 사이에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 양자를 언급한 말일 수도 있다.
세 번째 장은 한개의 단어 “불태움”으로 끝난다. 이 이미지는 이 시의 말미에 엘리엇이 단테의 “Poi s'ascose nel foco che gli affina" (그 때 그는 이들을 정제시키는 불 속에 자신을 감추었다)란 말로부터 인용한 문장으로 채워진 것이다. 연옥(Purgatorio)에서, 이들 단어들은 아르노 다니엘의 영혼이 단테에게 간청한 어떤 장면의 결론을 기술하였다. 아르노 다니엘은 단테에게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도록 요구했다. 엘리엇이 파운드에게 이 시를 헌정하면서 사용한 "il miglior fabbro"란 구절은 우연하게도 단테가 묘사했던 동일한 이 고행자이다.
어쨌든, 이 시의 불교적 요소에 대해서는 충분히 얘기했다. 5번째 장에서의 두개의 주석은 독자들에게 엘리엇의 힌두사상의 원천을 떠오르게 한다. 첫 번째의 402줄은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다타, 다야드밤, 다미아타’ (주어라, 공감하라, 절제하라)” 그리고 이미 언급한 우파니샤드를 떠오르게 한다. 이 시인의 마지막 줄에서 두 번째의 주석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샨티. 이는 우파니샤드에서의 형식적 마무리이다. ‘이해를 넘어서는 평화’는 이 단어의 의미이다.” 3번째 장의 말미에 있는 이 문장에서와 같이, 이 시인은 다시금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전통을 연결시키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첫 번째의 예는 이 두개 중 비교적 불명료한 것이다.
엘리엇은 우리를 위해서 5장의 첫 번째 부분의 주제들을 “엠마우스의 여행, 위험한 교회로의 접근. . . 그리고 오늘날 동유럽의 쇠퇴”로 정확히 요약하고 있다. 이들 중 처음의 두개는 성서적이다: 375 줄,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엘리엇은 고전과 아마도 이집트적 전통과의 관련에 의해 자신의 주제를 확장시킨다. 강가-근대의 갠지스 강-에 대한 언급과 함께 396줄에서, 엘리엇은 인디아로 향한다. 마치 한개의 구절을 형성하듯 하는 이 주석에서 인용된 3개의 산스크리스트 단어들은 사실상 그 자신의 원천으로부터 발췌되었으며, 또한 이 시에서 조차도 처음으로 이 텍스트에 3개의 운문에의 도입으로 합쳐졌다. 이들은 이 시의 다음 줄에서 마지막 줄까지에서만 합쳐진다. 중요한 사항은 엘리엇이 이 순서를 역순으로 하였다는 사실이며, 이 역순에서 이들 단어들은 우파니샤드에서 발생한다. 여기에서 이들은 (번역으로) 다음과 같이 읽혀진다 : 절제, 공감, 베품. 왜 엘리엇은 그렇게 했을까? 정확한 답은 알 수 없겠지만, 이에 대한 두개의 타당한 설명이 있다: (1) 역순은 보다 기독교적 가치의 순서를 발생시키며, 그에 의해 힌두교의 원리를 기독교화하는 것이다. (2) 이는 기원에 대한 회귀를 시사하는데, 이는 이 시의 일반적 노력의 일환이다.
엘리엇의 의도가 무엇이든, (“샨티 샨티 샨티”)라는 종결과 더불어 어미에서 둘째줄에서의 이들 3단어의 반복은 분명히 이 시에 일종의 산스크리스트적 결론을 부여하게 한다. 엘리엇 그 자신이 힌두교적 전통에서 이 마지막 세 개의 단어의 인습적 기능을 우리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무지 그 자체가 일종의 우파니샤드, 즉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성서로 의미되는 단어로 읽혀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엘리엇을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엘리엇이 1927년에 조심스럽게 언급하였듯이, “이 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도 훨씬 긍정적이다.”
나는 4개의 사중주 전체, 즉 종종 지금까지 주목되어 왔던 동양과 서양 전통의 혼합을 상세히 논의하지 말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황무지에서 관찰하여 왔던 많은 테크닉들은 확장되어 왔고 후기 시에서 세련되어 왔다. 초기 작품에서 이 시인에 의해 추구되었던 보편화는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서 보다 충분히 성취된다. 동시에, 1927년 이루어진 엘리엇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이 시에 색깔을 입히고 이 시의 성격을 중립성에서 편견으로 이동시킨다. 그의 저술과 동시대의 다음의 한 인용문은 새로운 정신을 표현한다: “내가 인간들 사이의 가장 심오한 차이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적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다.” 따라서 때때로 4개의 사중주의 보편적인 경향으로 파악되는 것은 확대해석되지 않아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엘리엇이 그가 초기에 자신의 “단편들” 가운데에 현시하였던 힌두교 전통의 요소들을 자신의 묵상으로 흡수시키는 이 정교한 기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때때로 그것이 크리슈나가 의미한 것인가를 의심한다,”로 시작하는 “냉정한 구원”의 3장은 아마도 그러한 흡수를 함에 있어서 최대로 노력한 것일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베다교에 대한 그의 가장 일관적인 설명을 구성하고 있다. 전체 문장을 주의깊게 검토하면 그가 사용하는 “인용”이라는 용어에도 불구하고(다시 말하건데, 이 소스는 번역되고 의역되었다), 엘리엇이 베다교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던 범위를 보여주고 있다. “불탄 노튼”의 처음의 오리지날에서 인용된 헤라클리투스 조차도 이제는 조정과 흡수의 동일한 과정을 겪도록 되고 있다. “황무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사실적 광경들은 일반화, 이미지 그리고 의역으로 얽혀진 어떤 명상을 방해하고 있으며, 이들 후자에 의해 다시금 방해되고 있다.
그리고 이 드러밍 라이너의 상판 위에서
당신의 뒤에서 넒히어진 고랑을 바라보면서,
당신은 “과거는 끝났다”라거나 혹은
“미래는 우리 앞에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해질녘에, 모양을 가다듬고 대기 속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있다 (하지만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언어도 아닌 소리, 그것은 시간의 속삭임의 조가비이다). . .
여기에 엘리엇이 엮은 크리슈나의 환기와 그리고 베다사상 그리고 불교적 전통의 상상력(“여기에서는 이승과 저승의 바닷가. . .”)이 다음과 같이 수반되는데 -
“존재가 어떤 영역에 서있든
인간의 마음은 죽음의 순간을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는 엘리엇의 상상적 환기의 포장으로 재빨리 재 흡수된다. 위대한 힌두교 텍스트의 재창조 혹은 “모방”으로서, 이 문장은 엘리엇의 스승인 에드윈 아놀드 경에 의한 번역으로 채워진다. 에드윈 아놀드 경의 아시아의 등불은 부처의 운문적 역사인데, 엘리엇 역시 이에 몰두했었다. 하지만 이 근대 시인이 냉정하게 힌두나 불교의 섭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엘리엇의 훗날 “냉담한 구원”에서의 전통에 대한 단절의 암시에 의해 시사된다. “냉담한 구원”에서 엘리엇은 “아시아의 해변가에서” 그리고 “에쥐웨어 로드”에서 “민족의 고민과 혼란”을 언급한다. 엘리엇에게 있어서 크리슈나는 때를 만난다; 즉 영국국교로의 회귀가 임박한다.
道不行乘桴桴於海
(내 가르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뗏목을 타고 바다에 표류할 것이다.)
에즈라 파운드의 동양과의 관계는 보다 방대한 주제이다. 엘리엇과 힌두교 전통과 함께, 많은 것들이 여기에서 줄여지고 단순화된다. 이츠와 일본에서와 같이, 많은 부분이 생략된다. 하지만 중요한 점, 특히 파운드가 카토스를 유교적이라고 생각했던 점은 과장이 없을 수도 있다. 더욱이, 변명을 하자면, 그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정확하다. 아무리 그의 적용에 있어서 오해의 여지가 있어도, 우롱되거나 혹은 비중국화되어도 - 혹은 아무리 명료히 파악되었다 하더라도, 반대적이며, 예리하게 현대화되고 찬란하게 적용되었다 하더라도 - 중국사상은 그의 사상과 미학적 실제의 본질적 모체를 형성한다. 파운드의 인생과 작품에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어떤 일반적 부합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증거를 찾아보자.
중국적 요소는 파운드의 작품에 3가지 주요 할당방식에 의해 도입된다. 첫 번째는 파운드가 다양하게 인용하고, 번역하고, 의역하고, 혹은 다른 방식으로 적용하는 직접적 전거이다. 둘째는 표의문자 혹은 논어와 같이, 이들 전거들 보다 더 일반화된 것으로, 일부는 이들 전거들의 산물, 일부는 그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들로서의 모델들을 포함한다. 세 번째는 파운드의 전거와 주석서의 전통에서 표현되거나 혹은 이 시인과 그의 서구 동료들에 의해 이들 전거로부터 추론된 문화적 가치들을 발췌한 이들 의견들을 포함한다. 큐레이터 학자들을 당혹케 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오해 보다는 오히려 이들 자료들의 실제적 사용이다.
왜냐하면 파운드는 서구 문명의 기술적 고안, 도덕적 개혁, 그리고 급진적 비평에 헌신했던 프로그램의 복음자였기 때문이다. 모두 3개의 영역에서, 중국적 원천과 모델은 유효하다. “오운각을 깨뜨리는 것, 그것은 최초의 과제였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다양한 원천들이 기여하였다. 그 중에는 19세기 프랑스의 자유시(vers libre)와 앵글로 색슨계의 두운체의 half-line 뿐만 아니라, (소위 “표의문자적” 성질들 - 문법적 희박성, “이미지적” 경향, 파운드가 과대평가한 경향이 있었던 시각적 구성요소로서 표의문자의 실제적 사용을 위해 문자수, 음의 고저 그리고 강조패턴, 규칙적 휴지부 그리고 끝맺음 운율의 힘을 간과했던 것으로의) 우리가 정의해왔던 중국시의 모델이 포함된다. 두 번째의 “과제”는 잘 가꾸어진 단락, 즉 추론적 서양의 산문적 요소를 깨뜨리는 것이었다고 얘기될 수 있다. 파운드가 종종 논의하였던 첫 번째의 과제와는 달리 그는 두 번째의 과제를 단지 그의 편지와 비평적 산문에서 구현하였을 뿐이다. 이는 점차적으로 점진적으로 대화체적 화법, 단편적 신택스 그리고 하나 혹은 두개 문장의 저널리즘적 단락으로 도입된다. 이러한 전체적 전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케언 윤리학에 관한 논문에서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여기에서 구어체적 주석은 비평적 과정으로서의 추기를 대체한다. 이 논문은 또한 세 번째의 공략 대상 즉 서구의 철학적 추론을 예시한다. 여기에서 공자의 논어 혹은 보다 넓게 보아서 격언적 지혜가 주를 이루는 중국 전통은 간결성과 구체성의 모델로 기여한다. 파운드의 산문에 있어서 이것의 기능은 그의 시에 있어서의 표의문자의 모델과 유사할 수도 있다. 이 표의문자는 - 이 모델은 표의문자적 방법론으로 확장되었다 - 여기에서 네번째의 공략대상을 위한 모델로서 작용한다. 그 네 번째의 공략대상은 서구전통에서 장편시의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구조이다. 페넬로사에 의해 제창되고 파운드에 의해 체계화된 표의문자의 이론은 또한 새로운 시이론으로 기여한다 (1935년의 한 편지에서 “시의 예술을 대해서는, 페넬로사의 중국의 문자에 관한 나의 마지막 에디션에서 나의 서문을 참조하라”라고 파운드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유교의 책임성은 파운드로 하여금 초월성을 향한 경향의 당연한 결과로서의 그리스와 기독교 사상의 무책임성으로 그가 간주하였던 것에 대해 개선책으로 작용하였다. 유교의 포용은 그로 하여금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그런 것처럼 파운드에게 있어서도 어렴풋이 도덕철학과 종교 사이의 경계를 건널 수 있게 하였으며, 따라서 1922년에 이미 오비드의 변형과 함께 “공자의 글”들은 이 시인에게 있어서 종교에 있어서의 유일한 안전 지침이 되게 된다.
이 모두에 있어서 중심인물은 현자(the Sage) 그 자신이었으며, 여기에서 인각과 철학에 대해 산문에서 표현된 바의 파운드 자신의 견해를 요약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파운드는 1917년 편지에서 마가렛 앤더슨에게 소고(the Little Review)를 위한 주제에 관한 논문을 쓰겠다고 시사하면서 첫 번째로 공자를 언급했다. 그가 번역하였던 공자의 고전들 중 첫 번째는 대학이었으며, 파운드는 이를 The Great Digest라고 하였다(1928); 다음으로 그는 중용(中庸)을 번역하였는데, 이를 그는 동요하지 않는 축(The Unwobbling Pivot)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1950년에 그는 논어를 번역한다. 이 마지막 작품을 그는 7페이지의 “요약본”으로 요약한다. 그와 함께 그는 문화가이드(the Guide to Kulchur)를 소개한다. 공자는 처음에는 서양사상 특히 그리스 사상의 대안으로 간주되었지만, 점차적으로 파운드가 다음에서 보듯이 궁극적으로 거의 신비적인 은유를 보편적 원형으로 변형시킬 때까지, 그 자신의 고전적 중국세계관의 중심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공자에서 맹자까지 일세기가 흘렀으며, 그리고 성 암브로스까지 또 약 600년이 흘렀고, 그리고 성 안토니오까지는 1,000년이 흘렀으며, 이들은 동일한 나무의 재료로서 한가지 패턴의 가지들로서 존재한다.” 중국의 전통에서, 공자는 신성시되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대응으로 중국사상을 개척하기 위한 파운드의 경향은 자신의 초기 기독교의 포기에 의해 촉진되었다. 단테의 인본주의적이며, 가톨릭적인 시각은 끝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파운드는 분명하게 구약성서적 문화를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어떤 것도 히브류 부족의 기록보다 미개하거나 혹은 세련된 문명에 적대적인 것은 없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파운드는 프로테스탄트적 기독교를 거부한다: “루터와 캘빈 시대에 이 야만적인 텍스트의 부활은 서양에 거의 엄청난 저주였다.” 나중에 기독교를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승화시켰던 이츠와 엘리엇과는 달리, 파운드는 초기부터 고전 그 자체를 전달하고자 하는데서 자유롭고자 하였다. 파운드는 고전을 호머의 형식으로 껴안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게서 구현된 그리스 철학의 형식으로 거부한다.
여기에서 파운드는 서양의 관념주의 보다는 공자의 현실성을 선호하게 된다: “불안정한(half-masted) 군주조차도 플라톤에게 그의 공화국을 시험하도록 10에이커의 땅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파운드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논어의 방식을 선호했으며, 그리스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플라톤 이외에는 평온함으로 가는데 다른 길이 없는 것처럼 거짓된 딜레마로 그 자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파운드는 서구사상의 추상적인 이론 보다도 중국사상의 구체적인 윤리적 기반을 선호하였다. 파운드는 말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가 아니라 마음에 관심이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도덕관념이 없는 전통”을 보급하였다. 서양철학의 전반에서, 파운드는 윤리적 논의를 회피하는데, “어떤 무의식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대학이나 중용 혹은 논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파운드는 “우리는 공자를 지혜로 받아들이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공허한 지식인으로 대접받아 왔다”고 단언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 조차도 파운드는 “말만 번지르한 것”으로 간주하며, 이는 “분명한 목적의 검토”와 대조하여 표상하는 그리스의 학문의 특징이라고 한다.
고대그리스를 르네상스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파운드는 “금세기는 중국에서 새로운 그리스를 발견할 수 있다”고 예언한다. 점차적으로 고대중국은 고대그리스를 파운드의 고전이념(paideia)으로 대체하게 된다. 파운드의 서적리스트의 개정판에서는 일곱 개의 제목 리스트로 해서 “사서”(四書)가 처음으로 언급되고, “호머:오딧세이”가 두 번째로,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이 세 번째로 그리고 “신곡”(Divina Commedia)이 네 번째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세 개의 전통으로 시작한 것은 궁극적으로 파운드로서는 자신의 첫 번째로서, 호머의 고미다락과 기독교적 인본주의가 3자관계를 채우는 경우가 된다. 파운드는 공자의 고전들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행위의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리스트의 나머지 6개 요소들을 필수품으로서 보다는 편의품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또다른 그의 다음 입장이 보다 일반적으로 명시된다: “옳든 그르든, 우리는 공자가 인생의 길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전망 혹은 경향 그리고 양자를 다루기 위한 시스템을 제공하였다고 느낀다.” 그의 암묵적 주제는 여전히 그리스 사상에 대한 중국사상의 우월성이며, 이는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그리스 전통으로부터 추출된 영역에서 표현되었지만, 그는 점차 중화사상적 시각을 지니게 된다. 중국역사의 장의 구성과 함께 이 균형은 중국으로 이동한다. 공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안이라기 보다는 문화의 정의를 위한 원천이 된다. 파운드에게 있어서 문화란 중국적인 것을 의미하였다. 2차대전중 그가 했던 라디오방송들중 하나에서, 그의 언어와 사상은 가장 중국적인 색채를 띠었다. 그는 “공자와 중국과의 관계는 물이 물고기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공자를 의미하는 공자의 원리는 천자(天子)의 진정한 거소이며, 그리고 황제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본분 혹은 뿌리는 하나이다(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己修身爲本). 중국사상은 공자사상으로 환원되어 왔다(파운드는 항상 도가적 요소와 불교적 요소를 거부하였다), 공자사상은 당시 정치적 안정과 실증적 변화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인은 중국역사의 장에 대한 일종의 주석에서 “중국에서 질서가 수립될 때나 장소에서, 어떤 주목할만한 개혁 혹은 건설적인 국가적 행위가 있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그 이면’ 혹은 ‘중심’에 일련의 공자사상가들을 보게된다”고 말한다.
“쿵”이라고 제목이 붙은 장의 마지막의 문화안내(Guide to Kulchur)에서 파운드는 공자의 사상을 “근본의지의 지류”라고 말한다. 앞서의 어떤 장은 “관념은 행동으로 옮겨질 때 참이다”로 시작한다. “칸티”(Canti)에서 파운드는 “칸토에 신비는 없으며, 그것은 민족의 이야기이다”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파운드의 시는 공자의 사상을 인류의 역사에 적용시킨다. 하지만, 여기에서 “신비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명백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 로린이 파운드의 칸토선집 오리지날 버전에 첨부했던 칸토 114에서의 한 문장에서 이 시인은 “나는 이것을 일관되게 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무엇을 일관되게 하는 것인가?라고 우리는 질문하여야만 한다. 후에, 동일한 문장에서, 파운드는 어떤 유용한 구분을 이끌어 낸다:
말하자면, 나의 노트는 일관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어쨌든 일관된다
칸토는 일관되지 않을지라도 우주는 일관된다. 말하자면 칸토는 또다른 세계, 즉 모두가 “일관하는” 세계를 지시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비록 서사시처럼 보이지만 - 그리고 파운드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한다 - 사실상 시각적이다. 엘리엇, 조이스 그리고 그러한 전통에 서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파운드는 결코 단체로부터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염원과 헌신 뿐만 아니라, 그의 상상력에 있어서 - 그의 명백한 배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깊이 자리잡고 있다. 파운드가 이러한 믿음의 흔적들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은 1935년 W.H.D. 라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그의 오딧세이 번역에 관한 주제의 편지에서 시사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나의 신적 능력의 일부를 그리고 내가 기독교적이어서 어떤 모호한 신이 나의 뒤를 붙잡는다고 철저하게 냉소적일 것이다.” 결국 칸토의 마지막 결말은 파운드가 초기부터 계획했던 낙원(paradiso)이다. 하지만 그것은 좀 다른 낙원으로서 공자에 의해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신성은 99번째 칸토가 다음에서 암시하듯 최소한 공자의 이성, 공자의 주제에 의해 움직여진다,
우리의 현자는 anagogico를 자극하기 위해
시험되는 것을 삼간다
칸토의 주석은 여기에서 가능하지 않으며, 유교적 요소의 철저한 논의조차도 가능하지 않다. 대신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이들 칸토들은 파운드의 유교적 원리에 대한 산문적 설명과 관련하여 공자에게 가장 많이 헌신되었음을 고찰할 것; 둘째, 고전주의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에 대비하여 이 동방적 요소에 무게를 둘 것. 필자는 파운드가 대부분의 집필을 완성하고, 보다 중요하게는 자신을 유교적 관점과 동일시한 시기인 1966년 그에 의해 세상에 나온 칸토선집을 텍스트로 삼을 것이다.
24개의 칸토의 마지막 선택은 (그리고 그의 일부는) 호머적 유사성을 띤다. “그리고나서 배로 내려갔다”라고 이 시는 시작한다. 그의 단축된 버전은 “뗏목에 있는 자여(piccioletta), 후진하라!”로 끝을 맺는다. 중간에, 우리가 보게 되듯이, 물의 이미지들은 그의 주제를 통합하는데 이바지한다. 그러므로 칸토 1장의 오딧세우스적 바다는 칸토 4장에서 다양한 물의 형식으로 나아간다. 마치 유럽적 나레이티브 방식이 크리스와 동방적(대부분 일본적인) 재료들을 연결하는 “이미지들의 얇은 필름”에 의해 대체되듯이 말이다. 칸토 4장은 기독교(“JHesus"는 교회의 권능과 권위의 상징이다)를 마치 호머, 동방 그리고 근대가 “그리고 우리는 인간을 비단전쟁으로 보냈다”라는 삽입줄 속에 결합되듯이 오딧세우스적 Sigismund Malatesta의 형식으로 소개한다.
공자사상을 설명하는데 주력한 2개의 후기 선집과 함께, 다음에 오는 canto인 제18장은 파운드 쓴 공자에 대한 가장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산문체의 요약인 그의 “논어 다이제스트”로 일시적으로 회귀함에 의해 가장 잘 소개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시인의 다이제스트를 12개의 원리로 차례로 환원하여 왔으며, 파운드가 이들을 제시했던 순서를 따랐다. 첫 번째는 무지(이 학구적 시인의 질문의 근거)를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정확한 술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파운드은 한때 cantos선집의 표지에 상형문자인 정명(正名)을 두는 것을 검토하였다). 세 번째는 지(止)로서 중용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인(仁)과 지인(知人)으로서 파운드의 버전으로는 “인간성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인가?”(仁者人也知者知人也)이다. 여섯 번째는 cantos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원리인 적시성이다(“봉건왕국의 제후는 편리하고 그리고/혹은 적절한 때 이외에는 그의 백성들에게 일을 할 것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使民以時)이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는 다음의 인용구에 표함되어 있다: “가정에서의 의무, 인간사회의 복종. 인간사회의 애정과 특히 덕의 인간에 대한 애정.” 여기에서 “의무”란 공자의 가정에서의 효도와 질서의 원리를 설명하고 효(孝)와 제가(齊家)를 결합한다(이로부터 다른 질서가 진행된다). “복종”은 형제애를 의미하는 제(悌)로 번역되지만, 이는 가정 바깥에서도 적용된다. “애정”은 공자의 중심원리인 인(인), 자애를 반복하는 것이며, 그리고 “덕...의 인간에의......애정”은 見賢思齊(누군가가 덕이 있음을 알 때, 그를 따르라)로 번역된다. “동등한 자 중에 친구를 구하라”는 無友不如己者라는 원리를 번역한 것이다. 11번째의 “나는 (정치적으로) pro-Tcheou이다. . . .그들은 자신의 선배들을 검토하였다”는 공자에 있어서 또다른 문장(周監於二代, 都유 呼文철! 吾從周)과 관련한다. 파운드는 이후 이를 일반화하며, “(전체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그들 이전 왕조의 문명과 역사를 검토하였다),” 그에 의해 자신의 방식 뿐만 아니라 공자의 방식 그리고 공자 이전의 주왕조를 설명한다. 12번째의 원리는 “6개의 문장, 그리고 6개의 혼란(六言六소),”로 구성되었으며, “학문의 사랑 없이” 겪는 것들, 혹은, 파운드가 사용한 무명의 번역으로, “자애로움”의 사랑(仁), “학식”(知), “정직”(信), “직설”(直), “용기”(勇) 그리고 “확고함”(剛)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교적 원리의 요약으로서 “다이제스트”는 논어와 마찬가지로 매우 비체계적이다. 더욱이, 파운드는 자신의 목적에 관심을 끌어당기고 심지어는 당대의 자신의 경제적 견해에 공자를 끌어들이는데 있어서, 의도적으로 특정적이다. 누락된거나 덜강조된 원리들은 충(忠), 수(수), 예(禮), 군자(君子), 그리고 왕도(王道)들이다.
하지만 파운드의 작품에서 어떤 점에서 생략된 유교적 원리들은 종종 다른 곳에서 소개된다.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이 시인에 대해 자신의 주제에 대해 부족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을 경고할 수 있는 실제이다. 그러므로 “다이제스트” 보다 훨씬 초기에 출간된 칸토 13장에서 우리는 이미 왕의 국가지배에 관한 것과(왕자는 학문의 후원자로 묘사되었다), 군자의 행위에 관한 것, (스승 자신의 인생에서 끌어진 예들에서) 충성의 원리에 관한 것들의 단락을 거쳤다. 초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자료들을 도입했던 파운드는 이 칸토에서 공자를 기독교적 견해와 구별하려고 고심한다 (쿵은 “‘사후의 생명’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 다음의 칸토인 제14장에서, 파운드는 지옥에서 캘빈을 그리고 “안보이는 것을 응시하는” 어거스틴을 보게 된다. 이 최초의 유교적 칸토의 목가적 성질은 고전적일 수도 있다. 어쨌든, 파운드가 표현하였듯이 이 시의 “도덕적 요소”는 스승의 윤리적 견해의 엄격성을 덜 강조하고, 그의 미묘함을 강조한다. 파운드의 설명은 현저히 완전하지만, 우리는 인(인)과 수(수)와 같은 중심개념들을 생략한 점을 주목할 수도 있다.
칸토의 첫 페이지는 여러 제자들이 모범적인 행위들을 제시한 논어의 한 구절을 번역하고 있다. 누가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그들 모두가 정확히 답변하였다 / 말하자면, 각자는 각자의 천성에 따라 답변하였다.” 이 마지막 구절은 파운드의 전거(변 各言其志也 己준!)을 부연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자는 보다 직설적으로 각자는 자신의 목적 혹은 관심에 따라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파운드의 사려깊은 “천성”의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번역하는데 있어서, 그는 또다른 공자의 원리(性)를 자신의 중용에 끌어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시에서 중요한 어떤 극단성의 한 조건을 수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usura의 주문으로 노래하는 칸토 제65장은 “반자연”(CONTRA NATURAM)이라고 하는 악마적 원리를 강조하는 진술로 결론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융합의 과정에 의해, 이 자연에 대한 개화된 동방의 찬양은 비자연을 지속하는 서구와 대조되고 있다. 서구의 관점은 파운드의 견해로는 돈의 오용으로부터 모든 방식의 “자연에 대한 죄악”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남용되고 있다.
“제퍼슨-신세계”로 색인되는 집단으로부터 게재된 칸토들 중의 하나는 이 서구적 유교의 지배자에 관한 최초의 예를 제공한다. 칸토 제31장은 “물의 소통” 특히 동부미국과 서부미국을 연결하는 운하의 필요성에 관한 주제로 제퍼슨이 워싱톤에게 보내는 서한과 함께 시작된다. 파운드는 아마도 전설적인 홍수조절 정책으로 유명했던 Xia 왕조의 황제인 우(禹)의 유사한 행위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파운드는 다음으로 미국혁명의 선동자인 토마스 페인느와 교신하는 제퍼슨을 인용한다. 제퍼슨은 “어떤 공공의 배 속에서 미국으로 통행하고자 하는” 팸플랫 저자에 관해 이야기 하고는 그에게 “귀하를 돌아오는 길에도 머므르게 할”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다고 안심시킨다. 다시 말해서 오딧세우스를 연상케 하는 페인느의 원칙에 충실한 외부의 여행과 회귀라는 근대적인 전설의 부활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에서 칸토는 미국적 경험에서의 두가지 평행선, 즉 하나는 중국적인 것, 또다른 하나는 그리스 적인 것을 수립한다. 그리고 모두는 왕(혹은 대통령)의 지배라는 항목 내에서 이루어진다.
칸토 52와 53은 한 쌍을 형성하며, 첫 번째의 것은 주로 루시의 여씨춘추에 반영된 고대중국의 신화적 세계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의 것은 중국의 초기부터 공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역사적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한 작업에 있어서, 파운드는 칸토 65장 “우수라(Usura)와 함께”를 12번째로 위치시키고, 그에 의해 칸토선집의 첫 절반을 채운다. 13번째인 칸토 52는 파운드 그 자신이 중국의 지혜(“알아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를 상기시키는 최초의 것이다. 대부분의 중국 역사 칸토처럼, 칸토 53은 여러 유교원리, 신화적 조각 그리고 역사적 기담의 오래된 혼합물이다. 당의 황제의 욕조에 나타난 비명에서 인용된 “새롭게 하라”라는 원리에서와 같이 초기 황제들은 표의문자로 소개된다. 파운드가 마지막 4 인물을 취한 원천은 국日新, 又日新, 日日新(오늘 새로운 것을 이루면, 내일도 새롭게 하고, 매일 이를 새롭게 하라)로 읽혀진다.
칸토 53과 그 이후의 문장, 칸토 57로부터 또한 파운드가 자신의 색인인 “중국의 칸토 - 존 아담스”에서 시사했듯이 어떤 한 쌍이 형성된다. 양자는 왕도의 원리에 관여하며, 53은 그의 예를 초기 중국역사에서 취하며, 57은 미국 공화국의 초기역사로부터 취한다. 양자는 또한 능동적인 현자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다. 가령 53은 공자를, 57은 존 아담스를 예로 들고 있다. 중국 칸토에서 파운드는 주(周왕조), 중니(仲尼, 공자의 또다른 이름) 그리고 다시 주(周)라는 표의문자와 함께 자신의 역사적 스케치와 간략한 일대기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앞서 “다이제스트”의 요약본에서 인용된 논어 중의 하나에서 어떤 팬턴을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 곳에서 공자의 어록이 주(周)라는 글자로 시작하고 끝난다. 이러한 기원에 대해, 이 시인은 칸토선집에서 우리의 최초의 “유교적” 회장인 “Mr. A”를 직접적으로 갖다 놓는다. 파운드의 태도는 그다지 공손한 것은 아니지만(“우리는 . . . 그가 전 미국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되먹지 못한 놈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어쨌든 파운드는 그를 통상적으로 조지 워싱톤을 위해 준비된 호칭인 “조국의 아버지”로 칭하고 있다. 그의 “공평성”(正), “정직”(誠), 그리고 “직접적 행동”(直)을 찬양하면서, 파운드는 논어에서 모두 논의된 장점들을 언급한다.
파운드가 피산 칸토에서 선정한 두개의 예(라프린은 또다른 구절을 추가한다)는 이 시인이 처음에는 자신의 3개의 주요한 전통으로부터 요소들을 재결합하고, 그 다음에는 이전에 제외시켰던 요소들을 흡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칸토 81장은 “제우스가 케레스의 가슴 속에 누워있다/타이샨은 아프로디테 밑에서 사랑에 쌓여 있다”로 시작한다. 이는 고대그리스와 고대 그리스의 고대성에서 그리스적 원형 내에 펼쳐지는 종교적 힘에 비교될만한 어떤 신화를 찾기 위한 중국적 전통을 모색하는 이미지이다. 자신의 고대 종교의 이미지들을 직접적으로 병치하고서 이 시인은 카톨릭이 종교적 힘을 상실했다는 취지로 한 근대의 스페인 사람을 인용한다. 하지만 파운드의 배타적 정신에서의 어떤 변화가 나타난다. boddhisattva avalokiteshvara(“Kuanon의 갈래로서의 빛”)을 흡수한 초기 중국의 신인 觀音과 관련하여, 그는 불교적 전통을 인정한다. 칸토는 구약에 대한 그 자신의 거의 동정적이지 않은 언급들 중 하나로 지금은 유명하게 된 “욕심을 버려라”로 반복되는 구절과 함께 끝을 맺는다. 또다른 히브류적 언급이 칸토 LXXXIV의 다음 여러나라 말로 쓰인 구절에서 나타난다:
quand vos venetz al som de l'escalina
ήθοζ gradations
These are distinctions in clarity
ming 明 these are distinctions
John Adams, the Brothers Adam
There is our norm of spirit
our chung 中
처음 네 개의 문장은 신비주의적 업적, 윤리적 위계질서 그리고 철학적 명료성의 이미지들에 있어서 기독교적, 고전적 그리고 동양적 원천들을 결합한다(明은 대학의 명료성의 원리인 “大學之道在明明德”로부터 유래하였으며, 여기에서 마지막 4개의 글자, “명쾌한 덕/본성의 이해에 있어서”는, 후자는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다음 3개의 문장은 미국적, 히브류적 (그리고 암묵리에 기독교적인) 재료들을 중국적 원리와 관련시키므로서 일종의 근대화된 유형에 의해 존 아담스는 공자의 대체인일 뿐만 아니라 제2의 아담이 된다(파운드의 초기 찬사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한다). 일찍이 칸토에서 파운드는 여러 원리의 상호교환성을 지시하기 위해 “humanitas(인품) / 혹은 仁이란 구절에서 3가지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르네상스 라틴어, 영어 그리고 중국어), 이의 인용에 있어서 그는 “어근”이 전적으로 그의 주요 전통으로부터 끌어질 수 있는 상호문화적 표의문자를 의도하고 있다.
그는 문화가이드(Guide to Kulchur)에서 “공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관념은 아마도 위대한 섬세함을 이해하지 못하여 왔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칸토 85장에 인용된 문장은 “영(零)”으로 시작한다. 파운드는 상나라의 정치기인 이윤(伊尹)의 목소리로 “위대한 섬세함 때문에 우리의 왕조가 도래하였다”라고 덧붙인다. 이 유교적 지배자와 필적하는 두 명의 서구의 사람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한다. 전자는 오비드(종교안내)를 번역하고, 후자는 평가(파운드의 문명의 척도)를 기술한다. 칸토 108에서 선택된 구절은 르네상스의 전거 이후 파운드에 의해 변형된 “엘리자베스”를 사랑의 원리 즉 “Angliae amor”로 이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법학자 코크의 이름이 “용경”(庸經)의 뒤에 나오는 문장에 병치되고, 그래서 영국의 법을 공자의 고전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 구절은 유황제에 대한 또 다른 암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칸토 115에서 파운드는 공자의 어록을 나중에 신비주의적 방식으로 두 개의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도식화하고 있다:
수정과 같은 파도가 엄청나게 밀려든다
近
乎
仁
그곳의 빛은 거의 고체적이다.
물의 이미지를 통해 종종 표현된 흐름의 주제는 빛나는 안정의 순간에 본질의 한계를 넘어선 물처럼 흐르는 빛으로 표현된 영원의 주제로 자리를 내준다. 중국인들은 공자가 자신의 규칙을 완료한 어록들을 재생산한다: 우리가 어떤 원칙을 따른다면, 우리는 “상당히 자애롭게” 될 것이다. 이 문장들을 종교적 시각의 문맥에 놓음에 의해, 파운드는 공자의 지혜를 행복의 상태로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칸토의 첫 단어인 “사랑”을 우리는 amor와 함께 또 다른 삼요소를 형성하는 仁에 대한 파운드의 번역으로 다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의 단 한 개의 문자를 인용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에서 中庸에 대한 그의 인용은 일종의 복화술을 나타내며, 거기에서 파운드는 공자의 목소리를 상정하고 있다. 인용된 구절에 수반되는 문장에서,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중국어를 쓰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一
人
이 언어에서 주요한 “하나” 그리고 “인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가장 단순한 문자를 사용하므로서, 그는 “모든 민족은 한 인간의 육체로부터 시작된다”라는 칸토 1009에서 따온 새로운 주제를 개시하는 문장을 구사한다. 물론 이 또한 부수적으로 칸토를 단 한 사람의 저자, 가공적인 시의 전통에 서게 하는 것의 어려움을 명료히 하고 있는 진술인 “이는 픽션도 아니며 / 한 인간의 작품도 아니다”와 모순되고 있다. 자신의 작업의 진행에 있어서 많은 인물을 상정하여 왔지만, 파운드가 채택한 마지막 마스크는 공자이며, 공자의 철학을 그는 이제 이 주제에 관한 마지막 도덕적 에세이 속에 결합시킨다. 여기에서 그의 방식은 산문과 시에 있어서 자신의 초기 접근 보다 더 원시적이면서 또한 더 실용적이며, 더다 백과사전적이며 그리고 더 대화적이다. 이 문맥으로부터 분리된 두 개의 문자 兆와 恩이 공자의 사상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파운드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징후는 정치적 재앙에 선행하고, 보은은 효도의 원리의 근간을 이룬다). 이 시인은 “九經,” “六藝,” 그리고 네 개의 端인 仁義禮智를 포함한 많은 원리들을 열거하고 있다. 많은 그 외의 원리들이 반복되고 있다. 어떤 것은 최초로 언급되기도 한다. 후자의 것들 중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가 아닐까 여겨지는데, 이는 파운드가 “나무의 뿌리와 샘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철저히 공자와 동화되기 위해서, 칸토의 음조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결합하고 있다. “기본은 인간이다/. . .하지만 4개의 TUAN/은 자연으로부터 온다,”라고 그것은 말하고 있으며, 그에 의해 유교적 원리의 확실성과 그리스의 이원론의 불확실성 양자를 전달하고 있다. 파운드는 스승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또한 자신의 유교적 의견들도 만들어내고 있다. 칸토는 이 시인의 유기적 은유로 끝을 맺는데, 이는 전통 언어에서 그 기원을 갖는 은유인다. 즉 富人(지혜가 출중한 자)은 하늘, 땅, 중간을 수령하고/ 그리고 가꾼다.
유교적 원리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진술을 완료하고, 파운드는 다른 관심사를 추구하기 위해 이 주제를 떠난다. 그리고 유럽의 암흑시대, 영국법의 발달, 그리고 그 외의 주제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하므로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딧세우스적 지성으로 재천명한다. 물론 그러한 외적 인격 내에서 가르침이 수용되지 못한 현자의 모습을, 특히 그의 말년의 오랜 침묵 속에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말이다.